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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부탄을 떠나야 할 날이 왔다. 부탄 친구를 사귀면 주려고 준비했던 소소한 선물을 두 사람에게 줬다. 한국에만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주전부리들을 포장해서 좀 가져갔었다. 미안할 정도로 별것 아닌 선물이지만 늘 그렇듯 그들은 고마워했다. 번잡한 공항 입구에서 내려 인사를 나누던 우리는 한참 떨어지지 못했다. 열흘 동안 가족보다 더 긴 시간 붙어 다니다 보니 떨어진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두 사람이 한국에 온다면 내가 가이드와 운전사 노릇을 다 하겠다는 불확실한 약속을 남긴 채로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먼 나라인 만큼 이번 생에는 다시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간직했다.
부탄에서 출국하기는 난생처음이라 좀 서둘렀는데 너무 일찍 도착했다. 심지어 비행기도 지연돼서 한참을 기다렸다. 나는 혹시 영어로 나오는 방송을 못 들어서 비행기를 놓친 게 아닌가 싶어 몇 차례나 승무원에게 시간을 확인했다. 책을 읽다 시계를 보다 방송이 나오면 귀를 쫑긋하다 그렇게 부탄에서의 마지막 몇 시간이 갔다. 부탄에서 한 마지막 선행이라면, 같은 비행기를 타는 태국 남자가 옆에서 불안해하길래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안심시켜준 것 정도. 얼마 후 노란 꼬리를 단 국영 항공기가 종이비행기처럼 사뿐하게 파로 공항에 내려앉았다.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였다.
네 시간 늦게 온 부탄발 비행기
방콕으로 향하는 길에 인도의 한 도시를 경유했다. 나는 비행기의 작은 창문 밖으로 이름 모를 마을의 가옥들을 신이라도 된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저공비행한 덕에 동네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번개 맞은 듯한 야자수가 엉성하게 드리워진 거무죽죽한 인가에는 토벽이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수해가 있었는지 사각으로 다듬어진 논도 넓게 침수돼 있었다. 사람이 있어도 황량하고 물에 젖어있어도 메마른 느낌의 땅이었다. 비행기로 커다란 산맥을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마을과 사람들의 풍경이 이렇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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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비밀은 뭘까, 라는 최초의 질문에 관한 답안을 떠나는 길에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질문을 계속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 건, 이참에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찾아보겠다, 따위의 고색창연한 발상 때문이 아니다. 나는 다만 언젠가 죽기까지 그 몇십 년만큼은 지금보다 낫게 살고 싶어서 이런저런 개인적인 궁리를 해보는 것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 달에 30만원을 벌면서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시절이나, 40만원짜리 알바를 하면서 자유롭게 다큐 찍던 시절, 혹은 80만원을 받고 심각한 자폐나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의 활동보조인으로 일할 때, 몸이 힘들어도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았고 내가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를 더 받으며 정규직으로 일하는 지금은 어딘가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삶은 간단하지 않았다. 물질이 늘어나 풍족해졌지만 자유가 줄고 나이를 먹으니 내가 불행하다는 자각이 강해졌다. 나는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과 내 삶을 비교하게 됐고 더 많은 시간을 돈과 교환하게 되었다. 인간이 불가피하게 갖게 된 사회성은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격차를 기준으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가늠하게 한다. 따라서 상대적 격차가 큰 사회에서 사람들은 꿈을 이룬 후에도, 돈을 많이 벌게 된 후에도 만족하기 어렵다. 내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언제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판타지가 한국 사회에는 유령처럼 떠돈다. 하지만 이 사회의 실상은 그렇지 못해왔고 앞으로도 긴 시간 그렇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사실 무엇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었던, 머리와 가슴의 구상을 늘 손발이 실패하고 마는 현실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파로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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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가늠하는 데 있어 내 외부의 문제뿐 아니라 같은 무게로 내 내부의 문제 또한 검토되어야 했다. 사회의 문제가 거기 속한 모든 사람을 발 묶어놓는 문제라면, 개인의 문제는 나만 짊어지고 있는 짐가방이다. 여기에는 나를 힘내서 걷게 하는 열망이나 가능성도 들어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내 성장사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신경증이 부서진 건물처럼 막막한 무질서로 감정을 밀어붙인다.
나는 행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컸고 멋지지 않은 아버지를 두었다. 부모는 헤어지고 우리는 이제 각자 어른이 되어 살고 있다. 이제 그는 나보다 어린 캄보디아 여자와 결혼해 자식까지 낳고 사는 덕에 눈앞에서 보고 살 일도 없다. 심지어는 나이가 든 탓인지 성격도 유순해져서, 사실 나를 억압하고 내 어머니와 누나를 괴롭혔던 그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의 그림자와 싸우게 됐다. 내가 겪은 유년기 긴 시간의 결과 나는 어떤 형태의 권위적인 대상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학교생활이 이런 가정에서의 정서적 문제를 해결해줬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입학식 날 새 친구의 졸업앨범을 보다가 교사에게 뺨을 맞았던 고등학교 생활은 내내 그런 식이어서, 가정에서 쌓은 권위에 대한 신경증적인 반발감을 대체로 악화시켜주었다.
신경증은 실제로 나쁜 것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감 이상으로 휘몰아치는 격렬한 감정의 폭풍이다. 과거에 억압당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서 내 감정의 스위치가 눌리면, 수십 년간 쌓인 울분이나 공격성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사회 생활이란 어른스러워야 하고, 더구나 조직에서는 위아래가 확고하기 때문에 온갖 자기방어 능력을 동원해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막아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진땀나는 내면의 노동이 필요하다.
이런 신경증은 내가 하는 모든 조직생활의 현장에서 불편을 일으킨다. 군대 문화가 만연한 한국 사회는 어느 조직에 가나 수직적 통제로 사람들을 운영하는데, 나는 그 수직적 구조가 실제 사람들을 짓누르는 무게 이상으로 무너지곤 했다. 직장 상사들이 가진 권위적 태도에 필요 이상의 감정이 소모됐고,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를 거치다 보니 이제 새로운 무언가를 좋아할 에너지를 거의 남겨놓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실은 더 답답한 것은, 나도 모르게 내가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강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본래 모든 감정을 일으킨 사람은 사라졌는데 나는 같은 자리에 멈추어 근본 모를 흔적들과 싸우고 있다.
오색의 룽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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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빚어내는 초인식적인 질서가 있고 그것을 더듬던 인간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대충 ‘운명의 신’이라고 이름 붙여놓았다면, 그 운명의 신이 인간에게 하나쯤 조건 없이 자애롭게 베풀어준 것이 있다.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개수의 다양한 조각들로 맞춰놓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눈앞의 세계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믿고, 또 광고부터 뉴스까지 취향 맞춤으로 보여지는 요즘 시대에는 더욱 인식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지만, 어느 날 마음먹고 한 발만 밖으로 나가보면 전혀 다른 색깔의 사람들과 삶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언론인이라는 직업이 좋았던 하나의 이유는 일을 하며 그런 세계를 탐험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떤 결핍, 혹은 어떤 독특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상 어딘가에는 그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따뜻해진다. 문제는 그 자리를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고 모험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언젠가는 흐르기를 멈추고 고인 물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멈춰서 부글부글 끓다가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태를 이룰 만한 웅숭깊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볼 때 부탄 사람들이 행복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험이었다. 왕은 국민들에게 '행복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그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언제든 일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 떠나라고 얘기했다. 춘쭈르도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모든 부탄인이 선망하는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여행 가이드가 된 것이었다. 정부는 모험을 떠난 사람들이 지나친 불안에 몸을 움츠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줬고, 뜻이 있는 사람이 교육을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 위에서 사람들은 모험하고, 자신을 깨닫고, 끝내 뿌리내릴 곳을 발견하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멍멍이들이 사는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