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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Aug 19. 2024

어떤 취업


작년 가을, 그알에서 내 차례의 방송을 준비할 때였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일하다 탈출했다는 한 남자를 만나서 인터뷰하기로 했다. 


흔치않은 스펙의 인물이다보니 어떤 행색으로 나타날까 궁금했다. 그런데 뜻밖에 머리 스타일부터 옷차림까지 아주 평범한 20대 후반의 남성이 나타났다. 강지훈(가명)씨였다.


어떤 취업


그가 캄보디아에 가게 된 과정은 단순했다. 지인을 통한 일종의 ‘취업 추천’이었다. 한때 조폭 조직 몸담았던 동네 형이 강 씨한테 가보겠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전화 몇 번 돌리고 글 좀 써주면 돈 잘 벌 수 있는 자리라면서.


마침 일도 없고 돈은 궁했던 터라 건너갔다는 그곳... 카지노를 비롯한 각종 도박장과 환락 시설이 가득한 캄보디아 외곽 도시 시아누크빌에서 그는 보이스피싱 회사(!)에 합류했다.



그 조직은 강남의 신축 빌딩을 방불케하는 20층 규모 건물에서 10여개 층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1층에는 식당과 편의시설이 있고, 2~3층에는 실제 범죄를 실행하는 업무 공간이 있었다. 4층 위로는 층마다 국가별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4층은 한국인들만 쓰고 5층은 중국인들이 쓰는 식이었다. 


그 조직은 군사 조직도 운용하고 있었다. 강 씨는 종종 건물 1층에서 십수명의 군복 입은 사람들이 모여 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물의 정문은 무장한 캄보디아 경찰 수십 명이 지켜주고 있었다고 한다. 



그 조직은 다양한 일을 벌였다. 


실제 범죄가 이뤄지는 작업장은 ‘강의실’로 불렸는데, 제1강의실에서는 보이스피싱, 제2강의실에서는 주식 리딩방 사기, 제3강의실에서는 코인 사기가 이뤄지는 식이었다.


범죄는 군인들의 전투처럼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이었다. 주식 리딩방 팀장이 콜을 하면 한 명을 속이기 위해 조직원 100명이 카톡방 하나에 진입해서 작업에 돌입했다. 


일종의 ‘R&D’ 팀이 있어서 신종 수법 개발도 모두 내부에서 했으며, 경우에 따라 비슷한 조직들끼리 새로운 스타일의 범죄를 개발한 뒤 대가를 받고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산업화된 범죄 집단이었다.



그 대단한 조직에서 부여받은 강 씨의 임무는 단순했다. 


조직의 리더 역할을 하는 중국인들이 보이스피싱 대본을 쓰면 조선족이 1차 검수를 하는데, 그걸 받아 최종 검수를 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만드는 역할이었다. 이 범죄극의 모국어 작가였던 셈이다. 


하지만 강 씨는 적응에 실패했다. 일하다보니 그들이 마약을 비롯한 각종 중범죄와 연결되는 부분도 보였고, 금융 사기도 생각보다 심각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자기가 똥밭에 굴렀어도 나름 “남자답게” 살아왔는데 이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는 것이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 입에서 계속 맴도는데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가 얻어맞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소신과 달리 강 씨는 무릎도 꿇고 사정한 끝에 그 조직에서 사지 보존하고 벗어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700달러만 주면 너네 쥐도새도 모르게 처리해주는 업자들 여기 널렸어. 근데 너네는 OO형하고 아는 사이니까 그냥 보내줄게. 고마운 줄 알어”라고 중간 팀장은 (조금 오싹하게) 말했다. 


팀장은 한국가서 입단속 잘하라고 반 협박하며,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를 던졌다. 입국 비용과 체류비 명목의 돈을 입금하라는 것이었다. 



영화 <시민 덕희>를 비롯해 대부분의 영화나 시리즈물에서 중국이나 캄보디아 온라인 금융 범죄자들을 궁색한 비주얼로 그린다. 


나는 그렇게 전형적인 구멍가게 간지는 아닐 거라고 짐작했지만, 적어도 허름하고 낡은 뒷골목에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화려한 외관과 산업적 체계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쓸어담는 막대한 범죄 수익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게 맞나


정상적인 사회라면 평범한 사람들이 범죄의 목표물이 되는 일은 매우 드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매일 온라인 범죄자들이 던진 낚시줄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꼴을 본다. 


얼마 전에는 미국 사는 친구가 잠깐 녹내장 치료차 한국에 들어왔다가 중고거래 사기를 당했다. 


한국에서 꼭 보고 싶은 공연이 있었는데 한 푼이라도 싸게 티켓을 구하려다가 사기를 당한 것이다. 사기꾼은 잠적도 안 하고 나 잡아보라며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중이라고 한다. 



대부분 피해자들이 낚이는 계기는 비슷하다. 팍팍한 살림에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다가 당한다. 


그알 팀에 있을 때 보면 정말 많은 피해 제보가 들어온다. 온갖 보이스 피싱, 스캠, 코인 사기... 심지어는 생활용품을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게 해준다는 포인트를 수백만 원어치 구매했다가 사기당한 젊은 주부들도 있었다. 친척들 단톡방에 보이스피싱 예방 영상을 퍼나르던 20대 명문대생도 당했다.


십여년 전만 해도 사기라는 건 어쩌다 소수가 당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항상 온라인이고 사기꾼들은 24시간동안 온갖 미끼를 물린 낚시줄을 던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1000% 수익을 약속하는 리딩방 유도 문자가, 코인 대박의 비법을 전수하겠다는 텔레그램방 주소가, (아마도 강 씨 같은 한국인에 의해 검수되지 않은 듯한) 어설픈 한국어 스캠 문자가 날아와 꽂힌다. 


잠깐이라도 정줄을 놓았다가는 그 수없이 달아드는 낚시찌 중 하나에 입이 꿰어 딸려갈 것이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검거 능력이
부족한가?


온라인 사기는 밟으면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는 지뢰와 같다. 이런 지뢰가 걷는 길마다 있어서 사람들은 하루하루 불안하다. 


그런데 지뢰 제거 임무를 부여받은 공권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면 대부분 “기다리세요” 혹은 “외국에 있어서 잡기가 어려워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고는 무소식이다.


정말 우리 경찰이 검거 능력이 부족한 걸까? 


그렇지 않다. 여러 비슷한 사건을 취재하며 느낀 것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한국 경찰은 범죄자 검거 능력이 꽤 뛰어나다는 것이다. 


텔레그램 n번방의 주범 박사와 갓갓을 검거하는 과정이 그랬다. 완벽히 익명화된 플랫폼에서 일어난 범죄였지만 경찰은 온갖 창의적인 방법을 써서 플랫폼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해결했다.


단, 이런 적극적인 해결에는 조건이 있다. 


국민의 관심이 사건에 모여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선 순위가 올라가고 경찰은 능력을 집중한다. 바꿔 말하면, 해결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다보니 세상의 주목이 덜한 사건들은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다.


영화 <시민 덕희>


영화 <시민 덕희>의 주인공 덕희씨는 사기당한 돈이 너무 절박했던 나머지 직접 중국에서 범죄 조직을 찾아 나선다. 덕희씨와 ‘아줌마’ 동료들은 영웅적 활약으로 조직 총책을 검거할 단서를 확보한다. 그렇게 덕희씨가 직접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야 담당 경찰은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온라인 사기 공포에 시달리고, 경찰은 또 얼마나 답답하게 굴었기에 이런 영화가 나올까 싶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경찰을 욕한다고 해서 온라인 범죄의 검거율이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7월에만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젊은 경찰 3명이 자살했고 같은 시기 뇌출혈로 쓰러진 경찰관도 결국 사망했다. 한달 평균 자살하는 경찰관은 1.9명에 이르고 직무 스트레스 고위험군 비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캐릭터가 게으르고 무능한 경찰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경찰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은데 왜 더 열심히 안하냐고 비난하면 의지만 꺾인다. 



어떤  무능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온라인 범죄자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수법도 첨단화되고 있다. 


그 규모가 너무 커져서 이제 실업이나 폐업이 주는 경제적 고통과 온라인 금융 범죄로 인한 경제적 고통이 비슷해지는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이미 기존의 수사 인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어떻게 해야할까?   


이 정도의 문제가 되면 국가 시스템을 설계하는 최상위 권력에게 해결의 키가 넘어간다. 하지만 그런 힘 있는 사람들은 온라인 금융 사기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산가들을 위한 부동산 세제와 상속세 개편에는 그렇게 열심인데? 설마 보이스피싱이나 중고거래 사기 따위는 자기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까? 


주로 목소리 작은 서민들이 겪는 피해라서 무심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의도적인 무능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서민들 주머니 털어가는 악당들을 잡는데 국민이 준 권력을 성의 있게 써주시기를 바란다. 주머니가 가벼우면 인생이 무겁다. ☀︎ 




Q 파일 : 시사 다큐를 만들며 취재한 기록입니다. 모든 삽화는 Midjourney로 직접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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