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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Sep 23. 2024

자백의 늪 ① 2004년 괴담


이것은 내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살인마 이병주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도 그가 계속해서 벌이고 있는 음모에 관한 이야기다.



프로살인마. 


담당 검사가 이병주를 묘사하며 내게 했던 말이다. “이병주가 그런 얘기도 했어요. 유영철보다 내가 한 열댓 명은 더 죽였을걸?”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 이춘재 등 범죄의 규모가 거의 정확하게 밝혀진 한국의 여러 연쇄살인마들과 달리 이병주가 지금까지 몇 명을 죽이고 몇 건의 살인미수 및 암매장을 했는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그래서 나는 재판에서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2004년


그해를 생각하면 어디선가 피냄새가 난다.


대학 2학년때였다. 친한 친구들이 학교 근처의 신림동이나 신대방동 등에서 여럿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초부터 범인을 알 수 없는 연쇄살인과 살인미수 사건이 이 지역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서울 서남부지역 연쇄살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밤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면 먼 길을 걸어 여성 친구들을 데려다주기도 했다.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또래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서남부지역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30대 남성 정남규였다. 훗날 자백을 통해 드러난 바로 정남규는 약 3년간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정남규가 체포된 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살인사건들이 있었다. 피를 뿌리고 다닌 누군가가 또 있었던 것이다. 정남규와 전혀 다른 이유로 죄 없는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칼을 휘두른 살인마 - 그 이름은 바로 이병주다. 


이병주는 누구인가?


재판에서 인정된 이병주의 첫 번째 살인은 2004년 10월이었다. 


이병주는 필로폰에 중독되어 있었다. 중독자들은 필로폰을 투약하면 시각과 촉각이 예민해지고 피로감이 사라지며 각성과 흥분 상태가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병주는 범행 장소 인근의 공원에서 필로폰을 투약했다. 범행 전 필로폰 투약이 ‘준비 의식’과 같은 행위였을 것이다.


기운이 올라오자 이병주는 부유한 가정집에 들어가 금품을 털기로 마음먹었다. 범행 장소 빌라 2층에 이르러 벨을 눌렀을 때 가사도우미 강씨(60대 여성)가 문을 열었다. 이병주는 건물 가스배관에 문제가 생겨서 급히 점검할 것이 있다며 가스검침원 행세를 하며 자연스럽게 집 안에 들어갔다. 


집에는 강씨뿐 아니라 집주인 50대 여성과 그 친구도 있었다. 덩치가 작은 여성 셋. 범행 대상을 확인한 이병주는 칼이 든 연두색 쇼핑백을 주방 한쪽 구석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가스 밸브를 점검하는 척 살피는 동안 가사도우미 강씨는 이병주에게 주스를 한잔 주고는 퇴근했다. 이병주의 입장에서는 사람 수가 줄어 범행이 더 수월해진 것이다. 우연찮게 범행 직전 그 집에서 나왔기에 강씨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이때문에 한동안 공범으로 오해받으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제 집에 50대 여성 둘과 이병주만 남겨졌다. 


집주인은 거실에 있었고 친구는 안방에서 쉬고 있었다. 이윽고 이병주가 일어나 쇼핑백에서 길이 23cm 크기의 부엌칼을 꺼냈다. 그리고 집주인을 위협해 친구가 있는 안방으로 몰아넣었다.


각종 카드와 현금을 빼앗은 이병주는 주저하지 않고 다음 계획을 실행했다. 두 사람은 손에 방어흔을 남기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온몸에 10곳 안팎을 찔려 결국 사망했다.


피해자들의 숨이 끊어지자 이병주는 집안 곳곳을 뒤져 다이아 반지와 금목걸이를 찾아냈다. 시신에서 흑진주 반지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너 멀리 소공동까지 이동했다. 거기서 훼미리마트, LG25 등 당시 편의점 두 곳에 들어가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낸 뒤 도주했다. 피해자 옷장에서 꺼낸 버버리 체크 셔츠를 입은 채로.


이병주와 이진구


두 여성의 시신은 이틀이 지나서야 발견됐다. 피해자가 연락이 안 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20대 조카딸이 아침 일찍 집에 찾아갔다가 현장을 발견한 것이다. 이병주는 이미 숨어버린 후였다. 


2004년 수많은 살인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던 경찰은 또다시 전혀 다른 지역에서 참혹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자 궁지에 몰렸다. 강력팀 7개, 28명의 형사가 수사전담반을 꾸려 사건 해결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듬해까지 피해자 주변인물 수천 명을 용의 선상에 올려두고 샅샅이 털었으나 결국 범인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단서는 편의점 CCTV에 찍힌 이병주의 실루엣뿐이었다. 하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채로 버버리 체크를 입은 남성의 신원을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수사본부는 해체되었고, 사건은 미제 목록에 오른다. 


2004년 방이동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잡기 위해 배포된 수배전단지


이병주는 사실 범행 후 멀리 가지 않았다. 다시 송파구로 돌아왔는데, 방이동이 당시 이병주의 거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이진구라는 인물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이진구. 그는 누구인가. 


이 인물에 대해서 말하자면 몇 편의 글을 써야 한다. 취재 중 이진구의 범행으로 강력히 의심되는 1998년 미제 살인사건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병주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마쳐야 하므로 간단히 요약하고 넘어가자. 


그는 2011년 교도소에서 간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본인이 저지른 몇 건의 암수살인을 자백했다. 


1995년 익산에서는 차로 사람을 친 뒤 시체를 유기했고, 1997년 서울 서초동 디스코텍에서는 사장과 직원 등 2명을 살해했고, 2001년 익산 서점에서는 20대 여성 직원을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고 말했다. 이진구의 자백 전까지 모두 미제였던 사건들이었다. 


이병주를 만난 2004년 후부터는 같이 여러 건의 강도와 살인을 저질렀으며,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이진구 (2005년 머그샷)


당시 이병주는 30대 후반, 이진구는 50대였다. 이병주는 이진구를 공사장에서 만났다고 진술했다. 


두 사람은 강도 범죄로 여러 차례 복역한 후 2004년 초 출소해 함께 지내며 서울 곳곳에서 다시 강도 행각을 벌였다. 그들의 일상은 단순했다. 돈이 모이면 마약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다음 범행을 계획했다.


방이동 살인강도로 얻은 금품이 떨어져 갈 때쯤, 그들은 새로운 ‘한탕’을 모의한다. 훔친 물건들을 팔아온 집 근처 전당포를 털자는 것이었다. 전당포에는 금품이 많으니 성공하면 한동안은 넉넉히 지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 깔렸다.




손님의 정체


2004년 12월 8일. 


겨울비가 내린 뒤 뜻밖에 이른 추위가 풀린 오후였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조금 가벼워졌고 연말이 가까워지며 석촌동 대로변에 사람도 차도 북적였다. 


이미 여러 명에게 둔기를 휘둘러본 이진구는 전당포에 가기 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즐겨 쓰는 장도리의 자루가 조금 더 짧으면 숨기기도 좋고 휘두를 때도 편할 듯 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철물점에 들러 장도리의 자루를 잘라달라고 요구했다. 


짧아진 장도리를 두툼한 옷 주머니 속에 숨기고 이병주와 같이 전당포에 찾아갔을 때는 막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1시경이었다. 


전당포 사장 고씨는 단골 이진구가 오자 웃으며 맞이했다. 이진구는 잠시 할 말이 있다며 고씨가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이병주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대기실에 있었다.


갑자기 여자 손님이 한 명 들어오는 바람에 이진구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하지만 손님이 떠나자 범행은 순식간이었다. 이진구가 장도리를 꺼내 고씨에게 휘둘렀다. 고씨가 비명을 질렀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문쪽으로 비틀거리면서 도망쳤다.


이진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문 밖 대기실에는 이병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씨가 나오자 이병주는 준비해 간 칼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마구 휘둘렀다. 고씨는 즉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부자창에 의한 심폐정지였다.



범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옆 비디오방의 점원 신씨가 전당포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왔는데 때마침 피 묻은 칼을 든 이병주와 마주쳤다. 신씨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했다.


신씨는 “살인이야”라고 크게 소리 지르며 비디오방으로 도망쳤다. 이병주는 재빨리 신씨를 쫓아가 뒷덜미를 붙잡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신씨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이병주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스물두 살에 불과했던 청년 신씨는 현장에서 과다출혈로 즉사했다. 몸의 앞뒤 무려 18곳에 자절창이 남았다.


안타깝게도 이때 5번 방에서 한 커플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카운터 쪽에서 들리는 신씨의 비명소리에 5번 방에 있던 남자가 나왔다. 


그는 카운터 앞 바닥에 쓰러져있는 신씨를 보았다. 놀라서 휴대전화에 119를 누르며 비디오방 문을 열고 나서는데, 바로 건너편 전당포 철문에 이병주가 기대 서있었다. 칼을 들고 피 묻은 흰 장갑을 벗는 중이었다.


얼어붙은 남자를 노려보며 이병주가 말했다. 

“씨발놈아.. 신고했냐?”




<② 검거 작전>에서 계속됩니다.




Q 파일 :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본 기록을 전합니다. 이번 편은 <그것이 알고싶다> 1306회를 돌아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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