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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의 늪 ⑥
미아동 새벽 3시의 범인

by 재원


<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에서 이어집니다.



참혹한 사건을 세월 속에 묻고 살았을 미아동 사건의 피해자 윤모 씨. 당시 갓 스무 살이던 윤씨는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그의 가족 연락처를 어렵게 구했다.


윤씨는 이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여전히 힘겨웠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남편과 이야기 나누다가 반팔 차림의 윤씨 사진을 보았다. 몸 곳곳에 칼에 찔린 흉터들이 드러나 있었다. 그날의 끔찍했던 일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2004년 8월, 비 오는 목요일 새벽 3시 30분. 범인은 귀가하는 윤씨를 쫓아가 칼을 휘둘렀다. 윤씨가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쓰러져 소리를 지르자 다시 등을 여러 차례 찔렀다. 비명소리에 윗집의 불이 켜졌고 범인은 칼을 들고 도주했다.



윤씨는 사건 직후인 2004년, 그리고 이병주가 미아동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선 2021년, 총 두 차례에 걸쳐 진술을 했다. 그는 범인의 인상착의에 대해 “머리가 짧았고 키는 160~165cm 정도,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다고 증언했다.


이는 이병주의 인상착의와 상당히 일치하는 묘사였다.


하지만 인상의 우연한 일치만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는 없었다. 윤씨는 당시 밤이었고 비가 내렸던 데다 경황이 없었기에, 더 이상 구체적인 진술을 하지 못했다.



비 오는 밤의
목격자


미아동 사건에는 중요한 목격자가 있었다. 당시 30대 여성 강모 씨다.


진한 밤이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지만 강씨는 범인의 인상착의를 비교적 정확히 보았다. 그의 집은 1.5층 높이에 골목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 창문을 열면 가로등 때문에 아래가 환하게 보였다고, 당시 수사 기록에 적혀있다.



미아동 사건의 진실을 가려보기 위해서는 강씨의 기억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수소문 끝에 멀리 경기도 모처의 시골 마을에서 강씨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린 끝에 늦은 밤 귀가하는 강씨를 만났다. 이병주가 무죄를 받았고 미아동 사건의 범인이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내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강씨는 늦은 시간에도 자리를 내주었다.


“저희 집 창문 바로 앞에 밝은 가로등이 있었는데... 너무 환하다 보니까 제가 암막 커튼을 쳐야 할 정도였거든요”


그날 강씨는 새벽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어디선가 들리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창가로 나갔다고 한다. 그때 골목 위쪽에 누군가가 보였다.


“어떤 남자가 막 뛰어내려 오더라고요. 그러다 하필 제 창문 밑에 딱 선 거죠. 머리가 길지 않은데 제일 중요한 게 가운데가 좀 대머리라는 거.. 그날 비가 왔잖아요. 근데 머리숱이 적은 사람은 비를 여기에 맞으면 더 숱이 없어 보이거든요.”


강씨는 손으로 정수리를 가리키며 당시 목격한 장면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충격적인 사건이다보니 기억이 거의 풍화되지 않은 듯했다. 강씨는 2018년 재수사 당시 경찰이 찾아와 범인의 인상착의를 물었던 순간도 떠올렸다.


“형사님들이 휴대전화로 남자들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면서 넘기는데, 제가 이 사람이라고 딱 짚었거든요. 그랬더니 그분들도 놀라더라고요.“



강씨는 여러 남자들의 사진 중 이병주를 정확하게 지목했다. 2021년 재판에 출석해서도 이병주가 당시 자신이 본 남자와 인상착의가 매우 유사하다고 증언했다. 이토록 구체적인 증언에도 불구하고 왜 이병주는 무죄를 선고받았을까?



썩은 가지인가?


2021년, 미아동 사건 재판에서 판사는 사건 자체보다 이병주와 그 주변인들의 진술을 믿을 수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검찰의 기소 근거는 이병주 본인의 자백과 교도소에서 이병주의 말을 들은 주변인들의 진술이 전부였다. 이병주가 범인이라는 직접 증거(칼이나 DNA 등)는 전혀 없었다.


이병주는 자백 전에 교도소 같은 방 사람들에게 “내가 미아동에서 약에 취해서 사람 두 명을 죽였는데...”라는 식의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검찰은 이병주 주변의 수형자들의 전언도 증거로 묶어서 제출했다.



하지만 판사는 이런 진술들을 의심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목격자가 같은 내용을 진술하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 따로 본 것이 아니라 전부 단 한 명에게 전해 들은 내용이라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이 증거로 모은 진술들은 모두 이병주라는 하나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들이었다. 만약 이병주가 어떤 이유로든 거짓말을 했다면 모든 진술은 썩은 가지가 되는 셈이다.


재판부는 이병주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상당한 의심이 가지만” 이처럼 증거가 허술한 상황에서는 “혐의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무죄를 선고한다는 기록을 판결문에 남겼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다면 무죄로 추정한다는 형사 재판의 대원칙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병주를 정확히 지목했던 목격자 강씨의 결정적인 증언은 재판에서 어떻게 다뤄졌을까?


여기서 경찰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수사기관이 공판에 제출하는 모든 진술은 당사자의 서명이나 기명날인이 있어야 증거로서 법적 효력을 갖는다. 하지만 경찰은 강씨의 진술서에 날인을 받지 않았다.


재판부는 수사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하며 강씨의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당한 일이었다.



붉은 진실


결국 재판에서는 수사기관이 제출한 증거들이 미흡하다는 평가만 이뤄졌을 뿐, 새벽 3시 미아동에 일어난 사건의 진실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우리는 범죄 심리학자들과 함께 사건을 깊이 분석했다. 모든 진술을 번복하기 전까지, 이병주는 첫 번째 범행을 저지르고 두 번째 범행 장소로 가는 과정을 수사기관에 이렇게 설명했다.


“첫 번째 범행 후 어딘가로 막 달려가다가 교회 쪽에서 비를 피하며 좀 쉬었습니다. 교회가 이상하게 도로와 도로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가로질러 나온 뒤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여자가 오는 것을 보고... 욕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범행을 한 것 같습니다.” (이병주의 검찰 진술)



범죄 심리학자들은 이 진술 내용에 주목했다.


‘비가 오니까 교회 건물 밑에서 잠깐 쉬었다’는 진술은 누구나 꾸며낼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이상하게 도로와 도로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으며, 그 교회를 ‘가로질러 나와서’,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범행했다는 진술은 특이하면서도 구체적이다.


이런 진술들은 현장 상황과 정확히 일치했다. 첫 번째 범행 장소와 두 번째 장소를 잇는 경로에는 10여 층 규모의 큰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층을 뚫고 주차나 차량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필로티 구조다. 큰길에서 두 번째 범행이 일어난 좁은 골목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그 교회 1층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표창원 소장은 사건 현장을 자세히 살펴본 뒤, 이런 진술은 현장에 직접 와보지 않았다면 꾸며낼 수 없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이병주가 실제로 범행하며 겪은 내용을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이병주가 말한 교회의 필로티 아래. 큰길에서 이곳으로 내려와야 2차 범행 장소가 있는 골목으로 넘어갈 수 있다.
▲ 위에 서있는 자리에서 내려다본 범행 장소 방향의 골목


당시 혼수상태에서 겨우 의식을 되찾은 피해자 윤씨는 범행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무의식 중에 범인을 발로 찼는데 아마 가슴이나 배를 찬 것 같습니다. 제가 발로 차니까 뒤로 나자빠졌는데 엉덩방아를 찧듯이 넘어졌고... 그때 바닥에 칼을 떨어뜨렸는데 다시 집어 들고 제가 들어온 골목 입구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피해자 윤씨의 사건 직후 경찰 진술)


이런 진술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병주는 피해자 윤씨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말한다.


“망상 때문에 분노가 생겨서 칼로 찌르긴 했는데 이때는 (피해자가) 반항을 하더라고요. 발로 차서 가슴 부위를 찼는지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는지, 어쨌든 제가 넘어지면서 칼을 놓쳤어요.” (이병주의 검찰 진술)


범죄심리학자 박지선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런 내용은 거짓으로 꾸며낼 수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저항과 이병주가 말한 상호작용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고, 걷어차이고 넘어지고 비가 와서 피했다는 등의 감각 정보는 실제로 겪었을 때만 진술 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 또한 미아동 사건 피해자들의 몸에 남은 자상과 앞서 이병주가 살인 유죄를 받은 사건 피해자들의 시신에 남은 흔적이 동일인의 소행으로 판단된다는 의견을 주었다. 처음 대전에서 이병주가 잡혔을 때 거처에서 압수한 잭나이프로 남길 수 있는 흔적들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사건에 관한 모든 자료를 검토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하나였다. 이 잔혹한 범행들은 동일인의 소행으로 보이며, 그 범인은 이병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⑦ 사건 상인 (마지막편)>에서 계속됩니다.


Q 파일 :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본 기록을 전합니다. 이번 편은 <그것이 알고싶다> 1306회를 돌아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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