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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Q 파일

자백의 늪 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by 재원


<④ 수수께끼 놀이>에서 이어집니다.



이병주가 쓴 525통의 편지. 이것이 내가 이병주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지인 K에게 결백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다. K는 범죄자들을 폭넓게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이었다. 20여 년간 온갖 범죄자를 만나온 K는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살인마이자 쌍무기수인 이병주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그러면서 내게 판단해 보라며 두터운 편지뭉치를 건넸다.


이병주와 K가 주고받아온 편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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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도 없는 하얀 갱지에는 정갈한 글씨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 글씨들은 흐트러짐 없는 한 가지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무죄라는 것. 앞서 무기징역을 받은 2건의 살인사건 역시 공범 이진구의 범행을 자신이 뒤집어썼다는 주장이었다.



살인범의 말에
귀를 기울인 이유


나는 사회적 문제와 범죄를 다루는 직업인으로서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거짓말하는 많은 악인을 만나보았다.


보통 그들의 결백 주장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잘못을 따져 묻는 수사기관이나 언론을 속이려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임수가 실패하고 죄가 인정되면 그들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동력을 잃는다.


그러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가끔 특별한 예외가 있다. 수십 년의 투옥 생활을 하면서도 무죄를 주장하고, 심지어 출소 이후에까지 줄기차게 결백을 외치는 경우다.


우리는 화성 8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을 감옥에서 지낸 뒤 DNA 기술의 발전으로 뒤늦게 결백이 밝혀진 윤성여 씨를 알고 있다. 또한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21년간 투옥 생활을 하고 나온 뒤 다시 10년이 지나서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인철, 장동익 같은 분들도 있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25년간 갇혀있던 김신혜 씨도 최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신혜 씨 출소 현장에 모인 윤성여(왼쪽) 씨와 장동익(오른쪽) 씨


몇 년 전 나는,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여 년을 복역한 뒤 모범수로 감형되어 나온 60대 김모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형기가 끝나서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아내도 자식도 떠났고, 흘러간 젊음은 돌아오지 않으며, 1998년 투옥된 이후 세상은 이미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말이다.


놀랍게도 그를 살인범으로 만든 경찰과 윤성여에게 누명을 씌운 경찰은 당시 화성경찰서에 근무했던 같은 인물들이었다. 2019년 윤성여의 누명이 벗겨지고 경기남부경찰청이 자신들의 잘못된 수사를 사과한 이후, 몇몇 사람이 김씨 아저씨의 결백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 경찰이 윤성여처럼 죄 없는 사람을 또 살인범으로 몰지 않았나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재심 전문 변호사와 국가폭력 피해자를 돕는 시민단체 사람들과 함께 온갖 자료를 검토했다. 정황상 김씨 아저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철저히 준비해서 재심을 청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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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심은 열리지 못했다. 법원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재심의 개시를 매우 까다롭게 판단하는데, 필요한 증거들이 세월에 묻혀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씨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허공에라도 거듭 자신의 무죄를 외친다. 그 진실을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죽인 적이 없는데 끔찍한 살인범으로 몰려 모든 것을 박탈당한 현실에서, 그렇게라도 소리치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하는 수사와 재판에는 늘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런 억울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적지 않게 일어났다. 그렇기에 한 무기수가 500번이 넘는 편지를 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이 상황을 나는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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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연극


수백 장의 편지에 담긴 이병주의 설명은 단순했다. 모든 살인은 공범 이진구의 소행인데 자신이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이병주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은 이진구는 항상 이병주를 심리적으로 지배했다고 한다. 당시 이병주는 마약을 했고 조현병, 불안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등을 진단받아 정신적으로 취약했다. 그렇기에 사실이 아닌 것도 이진구가 자꾸 암시하면 실제라고 믿게 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둘을 동시에 조사했던 형사들도 이진구가 이병주를 심리적으로 지배했다고 말한다. 이진구가 이병주의 ‘대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당시 이병주는 이진구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고 대체로 침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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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진구가 방이동 살인사건에 대한 이병주의 기억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보낸 편지에는 ‘거두절미하고 형이 너에게 오더를 내린다. OOO(경찰)한테 편지를 써라’는 지시가 나온다. 일상적으로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였음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하지만 2011년 이진구가 죽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병주는 이진구의 암시와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났고, 마약 치료도 마친 뒤 시간이 흐르자 자신의 억울함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병주는 “내가 무기징역을 받은 사건에서 무죄라는 증거는 이미 갖추어졌으며” “제가 적어도 살인에 대해서는 하나도 관여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병주가 명일동, 미아동 사건을 경찰에게 거듭 자백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이라면 자백을 할게 아니라 재심을 청구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병주는 자신이 일부러 자백 연극을 벌였다고 말한다.


하나의 형사 사건이 별다른 증거 없이도 단순한 자백만으로 기소가 되고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음을 세상에 보이기 위한 자작극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앞 사건에서 자백만으로 무기징역을 두 번이나 받았기에, 이번에도 자백만으로 재판을 열어 모든 절차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명백히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련된 재판에서 이병주는 결국 자신의 목적대로 무죄를 받았다. 자백을 뒷받침하는 경찰의 수사나 검찰의 기소가 죄를 입증할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강도살인죄에서 왜 두 번씩이나 사건을 하였고 또 왜 두 번씩이나 무혐의가 되었나 이것을 먼저 세상에 터뜨려 보시지요” (이병주의 편지 중)




이병주와의 만남


앞서 재심 끝에 무죄를 받은 여러 억울한 분들의 옥살이가 시작된 것은 전부 2000년 전후였다. 당시 경찰이 미제 살인사건을 성급히 해결하기 위해 고문과 폭력을 휘둘러 무고한 이들을 범인으로 몰아넣은 사례가 적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경찰이 올린 혐의를 검찰이 검증하고, 이것을 다시 세 번의 재판에서 살펴보는 우리나라의 형사 사법 절차가 끝까지 모두 잘못될 확률은 낮다. 이병주가 그 희박한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믿어야 할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일반인은 수형자를 자유롭게 만날 수 없지만, 변호인은 재판을 앞둔 수형자와 긴 면담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형사 사건 전문 베테랑 변호사 한 분에게 질문 내용을 적어드린 뒤 이병주를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사전에 편지로 이병주의 동의를 받은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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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도소에서 변호사님을 들여보내고 한참 두 사람의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얘기를 마치고 나온 변호사님은 이병주가 “사리 분별을 정확하게 하는 인물이며, 주장에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병주는 변호사님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수사 기록과 재판 자료를 제공해 주기로 약속하는 서면도 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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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병주의 주장을 믿을 수 있을까? 억울한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다. 우리는 영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무죄와 유죄의 갈림길에서 반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미아동 사건을 직접 조사해 보기로 했다.


2004년 8월 비 오는 목요일 새벽 3시, 귀가하던 여성 2명이 칼로 잔혹하게 공격당한 사건이었다.




<⑥ 미아동 새벽 3시의 범인>에서 계속됩니다.


Q 파일 :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본 기록을 전합니다. 이번 편은 <그것이 알고싶다> 1306회를 돌아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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