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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약

항해가 시작되는 곳 ①

by 재원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경험들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다 이런 골치 아픈 일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는 기억에 남는 계기라 할만한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곤 한다.


때마다 다른 시기의 여러 일들이 생각의 터널을 따라 불려 온다. 시간이 더 흐르고 기억이 왜곡되기 전에 한 번쯤은 내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경험과 사람들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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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내가 그해 봄에 어쩌다 운동권 대학생이 된 사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의감에 불타는 대학생은 전혀 아니었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출세욕 같은 게 있었다. 간절히 원했던 서울대 컴공에 재수를 해서 뒤늦게 입학했던 그 해. 갓 대학생이 된 나의 희망사항은 빨리 졸업해서 벤처 갑부나 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에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을지..


내겐 벤처 갑부 꿈과 함께 한 가지 희망이 더 있었다. 대학 방송국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약간의 애정과 선망의 대상이던 초등학교 친구 채영 때문이었다.


채영은 내가 재수할 때 공부에 소소한 조언을 해줬다. 이 친구는 연대에 다니면서 학교 방송국에서 피디로 활동하고 있었다. 재수생 입장에서 대학 방송국 얘기를 들으면 온갖 청춘의 낭만이 다 거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쩔 때는 관악산 중턱에 세상 제일 재미없는 애들만 모여있을 것 같은 그런 학교에 가느니, 시내 번화가의 연대에 가서 채영과 같이 대학방송 피디로 활약하는 망상에 빠졌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실로 돌아오면 독서실 책상이었다.


결국 연대는 못 갔지만 서울대에서도 대학 방송국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개강 후 과 친구들과 노는 게 너무 재밌어서 입회 시기를 놓칠 뻔했던 3월. 벚꽃이 움틀 즈음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피디로 합격했고 그렇게 처음 ‘유사 언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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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채영을 만났는가? 하면 전혀 아니었다. 과와 동아리를 오가며 바삐 살다 보니 점점 그녀는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벤처 갑부가 되겠다는 마음도 조금씩 물러졌다.


그 과정에는 대학 생활을 하며 만났던 많은 인상 깊은 사람들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을 즈음 한국 사회에는 ‘거악’이 사라지고 독재자와 기개 있게 싸우던 학생운동도 연기처럼 잔상만 남아있었다. 대학교는 학문을 탐구하거나 사회 정의를 논하기보다는 취업을 위한 학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비정규직 투쟁이나 등록금투쟁, 노동운동이나 통일운동, 여성운동 등 학내외 사회운동에 연대하고 참여하는 학생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대학에 입학해서 내가 닻을 내린 두 곳의 항구 모두에는 운동권 선배들이 남아서 부지런히 물질을 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직 침몰하지 않은 작은 조각배 같은 공간들이었던 셈이다.


학교 방송국은 나름 언론 활동을 하는 곳이니 세상일에 관심 많은 선배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웬 컴퓨터공학과에도 사람좋은 선배들은 전부 운동권이었다. 그런 선배들은 자기 일보다는 후배들을 먼저 챙기면서 학회나 농활, 장터, 숱한 술자리들을 만들어서 우리와 함께했다.


나는 그런 선배들하고 많이 싸웠다.


빨리 혼자 돈 벌어서 성공하고자 했던 내 입장에서 보면, 약자들이 겪는 차별이나 구조적인 불평등은 남일처럼 들렸다. 뭔가 머릿속으로는 선배들이 하는 얘기가 맞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나이 많은 신입생이었던 내가 유달리 고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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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도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다. 선배들이 말빨이 뛰어나고 집요해서 나를 끝내 설득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들이 재미있고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방송을 만들고 같이 세미나도 하고 방송제도 준비하고 같이 밤새고 기타치며 노래 부르고 놀다가 술 한잔하고 다음날 일어나서 잠깐 수업 갔다가 중간에 농구 한판 하고 땀범벅이 되어 다시 동아리방에 모여서 웃고 떠들며 잡담을 나누다가 이따금 토론도 하고 데모도 나가는, 그렇게 사람들과 늘 같이 하는 시간들이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두려울 만큼.


순수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과 깊이 있게 연결되어 존재하는 경험. 어떤 보이지 않는 키가 크는 것 같았다. 꿈이라 믿었던 것이 식욕과 비슷한 욕심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까지는 물론 아니었지만 경쟁에서 이기고 부유해지는 것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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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몇 년 동안 내 작은 세상 바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길바닥에 패대기 쳐진 지체 장애인들과, 손배가압류에 시달리다 크레인에 올라가 자살한 노동자와, 민주화운동을 하다 죽은 청년의 부모님들과, 국가보안법 때문에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과, 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에 맞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평화를 위해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나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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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년 시간이 흐르고 4학년이 되었다. 학생운동과 방송 일을 하면서 학업을 미루다 보니 나이만 쌓여 있었다. 중요한 역할과 책임이 내게 맡겨지면서 떠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선배나 친구들은 자기 앞길을 찾아 여럿 사라졌다. 종종 쓸쓸한 마음이 들었고 계속 나만 이러고 있어도 될지 고민이었다. 계속 미뤄온 군입대도 큰 걱정이었고, (벤처 갑부를 꿈꾸었던 입학 초의 기세가 무색하게) 컴퓨터공학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 것도 문제였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좋아하는 내게 복잡한 공학이론이 난무하는 전공 수업은 큰 스트레스였다.


그러다가 그해 집에 안 좋은 일들이 생겨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부모님이 이혼할 때 혼자 집을 나와서 학교 근처 반지하방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타이밍에 3년여 만난 여자친구한테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받았다. 눈물을 뿌리며 청승맞게 학교 옆 녹두거리를 걷다가 돈도 없어서 천 원에 10개를 주는 붕어빵을 사서 저녁을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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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타는 연말에 찾아왔다.


그때까지 나는 학사경고를 세 번 받았다. 네 번 받으면 학교에서 잘리기 때문에 세 번 받은 후에는 나름 관리를 했다. 컴공과 전공은 걸핏하면 D나 F가 나오기 때문에, 에세이식으로 평가하는 인문대나 사회대 과목을 열심히 들어서 A를 받고 평균을 높였다.


그런데 그해는 여러 사건이 있다 보니 과목을 다 드롭하고 전공 두 개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두 과목만 잘 챙기면 되는데 기말고사 즈음 넋이 나가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전공과목 하나의 평점이 D 마이너스가 떴고, 전반적인 평점이 내려갔다. 이러면 학사경고 누적 4회, 즉시 성적불량 제적이었다.


교수님을 찾아가서 학점 한 단계만 올려달라고 읍소했지만 그는 원칙주의자였다. 학생 하나가 잘릴 위기라고 해서 성적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좀 반칙이긴 했다. 결국 승복.


나는 어렵게 들어간 서울대에서 깔끔하게 잘렸다.





<항해가 시작되는 곳 >에서 이어집니다.


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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