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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약

소박한 자유인

모든 것을 가지면 공허하지 않을까?

by 재원


고등학교 때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계속 풀다 보면 쉽고 간단한 문제를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파악하지 못한 출제자의 함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잔머리를 굴리거나, 전혀 쓸데없는 어려운 공식을 쓰다가 풀이만 길어진 적도 있습니다. 간단히 답을 찾을 수 있음에도 욕심을 부리다가 헤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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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함이라는 문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외로움, 허전함, 혹은 어떤 불충족감 같은 것들이 늘 마음속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서 엄청나게 애쓰고 있는데도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느낌. 하지만 이제껏 많은 것을 얻어왔음을 생각하면, 가진 게 없어서 허전한 게 아니라 기대가 너무 높아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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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경우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다 보면 계속 더 많은 욕심을 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이나 인정, 수치화된 성과나 상업적인 성공 같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갈망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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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이런 성공이나 욕망의 추구가 일종의 자기실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기실현과, 상업적 성공이나 주목을 많이 받는 위치에 오르고 싶어 하는 자기실현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이라는 통제불가한 변수를 배제하기에 조용한 성취감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소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든 새로운 방식으로 수학적 증명을 해보는 것이든, 기준은 내 안에 있고 길게 보면 모든 모험이 충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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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성공과 주목을 원하는 자기실현에는 끝이 없습니다.


세상의 파이는 한정되어 있기에 경쟁을 통해 남의 것을 덜어와야 합니다. 그래도 항상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보이기에 영원히 상대적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잡히지 않는 먹이를 잡으려고 계속 쳇바퀴를 굴리는 다람쥐 같은 모습입니다.


세속적 성공이나 주목, 인정은 우리 힘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늘 애쓰는 와중에 어쩌다 운이 좋아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하더라도, 잠깐의 충족 후에 또다시 밀려드는 공허감을 다루기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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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어떤 공허함으로부터의 자유란, 무언가를 달성하고 채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박함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차지하려 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 아름다운 것을 세상에 더하며 조화롭게 사는 것. 공허함도 외로움도 삶의 순환으로 받아들이고 적당히 불편하게 살다 가는 것. 소박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홍세화 선생님은 생전에 소박할 때만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더 많이 이루고 더 많이 갖겠다는 세상의 끝은 만인에 대한 전쟁일 테니까요. 세상을 위해서도, 저 자신을 위해서도 욕심을 줄이고 좀 더 소박한 마음을 누리며 한 해를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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