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을 하는 친구 소개로 영화감독들을 만나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평단에서도 주목한 독립영화를 만든 재능 있는 이삼십 대 영화인들이었습니다.
모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온갖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눴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부터 각자 직업의 고충과 개인적인 경험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재들이 우리의 테이블 위에 올랐습니다.
영화 얘기를 하다가, <한공주>처럼 명작이라고만 믿었던 작품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 감독의 관점은 제게 뜻깊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저 역시 그알을 만들며 느낀 한계나 방송국의 분위기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힘도 나는 대화였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돈’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영화판에 돈이 씨가 마르고 있다고 합니다.
상업적 성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독립영화들은 영진위 제작지원 사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의미가 있지만 성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 문화적 영역에 예산을 줄이고, 이에 따라 현장에서 다양한 독립 예술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들이 엎어지거나 축소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곧 이런 영화를 만드는 재능 있는 청년들의 생계가 어려워지거나 영화를 더 만들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매년 올해의 영화로 꼽는 작품들은 대부분 관객 수만 명에 불과한 독립영화들입니다. 이런 영화는 많은 관객을 모으기 위한 상업적 의도로 뻔한 신파나 억지 카타르시스를 넣지 않고, 우리 삶의 현장이나 사회의 부조리를 낯설게 들여다보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질문을 안고 극장을 나서면 삶을 돌아보게 되고, 주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깊은 인상을 받은 몇 편의 작품에 대해서는 글로 적어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딸에 대하여(2024), 너와 나(2023)) 이 모든 과정이 독립영화가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순간들입니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고, 좋은 글을 쓰고 이야기를 구상하는 감독님들의 활동에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장비와 후반작업을 하기 위한 약간의 예산조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이 나눌 것은 한숨뿐이었습니다.
문득 작년에 만났던 프리랜서 기자 K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언론사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일종의 ‘기자 지망생’ 상태에서도 사이버 성범죄에 대한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람입니다. 결국 여러 케이스를 해결하고 실제 범인을 잡는 데까지 성공한 이십 대 여성이었습니다.
출입처의 보도자료를 받아쓰는 기사나 기업 홍보형 기사를 쓰는 수많은 ‘정규직’ 기자들에 비하면 K가 해낸 활동의 가치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값진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공익적인 활동은 수익으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K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생계를 위해 작은 곳이라도 언론사 입사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경력으로만 보면 어느 지원자 이상으로 K의 뛰어난 역량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 되는 기사를 중시하고 말 잘 듣는 후배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그를 선택할지는 의문이라는 생각을, 속으로만 삼켰습니다. 선배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많은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생계를 해결할 정도의 수입을 얻으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발붙일 곳은 갈수록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군가의 ‘공적인 정열’은 냉소의 대상이 됩니다. 언론사, 법무법인, 공무원 조직처럼 사회가 그들에게 최소한의 공익적 사명을 기대하는 조직에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거나 공익적 가치를 말하는 사람의 의견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심지어 무능력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아예 함구하게 됩니다.
얼마 전 어느 방송국의 높은 분이 “폼 잡는 사람 따로 있고 고생하는 사람 따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돈 버는 드라마를 만들거나 협찬을 따오는 일은 ‘고생’이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 등을 만드는 것은 ‘폼 잡는’ 것이라는 냉소지요.
사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저조차도 고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기는 안 좋고 회사는 적자고, 일단 회사가 돈을 벌고 살아남아야 그 이후에 의미든 재미든 추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 재방송보다 시청률이 안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가하게' ‘폼이나 잡는’ 일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주변에 생각이 멋진 사람들이 전부 ‘돈이 없어서’ 힘들어하거나, 의미 있는 생각들이 ‘돈이 안되어서’ 회사 관리자들한테 냉소당하는 상황... 최소한의 원칙도 품격도 없이 수익만 추구하는 세상의 끝에 무엇이 올까? 최근 한국 사회의 온갖 참사들도 비용 절감과 효율만 추구한 결과 아닌가?
한숨만 늘다가 문득 정보라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저주토끼>, <너의 유토피아> 등 작품이 세계적 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는 작가님입니다.
소설 집필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할 텐데, 정 작가님은 전장연이나 해고 비정규직, 차별금지법 관련 집회 등 온갖 사회적 연대의 현장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강사의 퇴직금 차별을 없애기 위한 법정투쟁까지 하고 있으시고요.
할만하냐고 기자가 묻자 이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어차피 유토피아는 없고 불완전한 인간이 관리할 능력도 없다, 사회가 어떻게 해야 나아지는지 내가 장기적 전망을 세울 그릇도 못된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보다는 좀 나아질 거라고요.
인터뷰 내내 위트가 넘치는 정보라 작가님의 이 말이 묘한 위안이 되었습니다. 너무 큰 그림을 보면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부터 챙겨봐야 하겠지요. ☀︎
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입니다. 모든 삽화는 미드저니로 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