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짜리 영화가 단 하루를 다룬다면 좀 지루할 수도 있다. 호흡이 빠른 영화들은 몇 시간도 단숨에 훑고 지나가니까. 하지만 이 영화가 세밀하게 살펴보는 세미(박혜수)와 하은(김시은)의 하루는 다루는 감정의 깊이가 깊고 에피소드가 다채로우며 일상의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예를 들어 세미와 하은이 같이 버스를 타고 갈 때 이어폰을 두고 하는 에피소드가 그렇다. 감독이 대사를 잘 쓴 것도 있지만 이 순간과 영화적 상황에 깊이 몰입한 배우들이 만들어낸 매력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퀴어 영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하이틴 로맨스 같기도 한 이 영화는, 섬세한 감정선의 포착만으로 웬만한 범죄영화 못잖은 서스펜스를 이뤄낸다. 곧 부서질듯한 감정들이 모이고 분출하는 상황들을 개연성 있게 꿰어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쫀쫀해지는 것이다. 이야기와 감정뿐 아니라 상황에 대한 섬세한 연출, 그리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일부러 좁히는 듯한 빛의 표현 등, 이 영화는 올해 한국 영화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영화적 성취를 보여준다. 내 개인적으로는 올해 본 모든 영화들 가운데 가장 좋았다.
또한 그 결말에 이르러 생각지도 못한 채로 어떤 거대한 재난을 맞닥뜨리고 나니, 작년의 이태원 참사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속에 아직 치유되지도 해갈되지도 않은 어떤 상실감, 통증, 갈증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느끼게 됐다.
어떤 이들이 아무 죄도 없이 겪게 된 재난, 그 극단적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위로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개중에 가장 후진 행태는 정치인들이 재난의 현장에 가서 유족에게 위로하는 척을 한다거나 사진을 찍고 오거나 지키지도 않을 약속만 남발하고 오는 것이다. 이것이 후진 이유는 거기에 어떤 진심도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본이 아닌 이미지들만 남아있어서 뻔하고 추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조현철이라는 창작자가 만든 이 작품에서는 긴 시간 재난의 사회에서 고민하고 마음 아파했던 흔적과 깊이가 느껴진다. 물속에 잠긴 공룡을 구해주는 아이의 모습이나, 수학여행을 무사히 마친 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특히 인상 깊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사가 있기 하루 전날 학교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무심하게 다음날의 수학여행을 준비하고 하루의 일상을 마무리하는 학생들과 가족들의 모습이 쭉 이어지는 시퀀스가 좋았다. 재난을 재현하는 창작자의 사려 깊음이 느껴진다. 너무 자주 소비된 뉴스 속 단어로서 무슨 참사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삶의 주름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 속 어떤 누구도 관객에 앞서 울지 않지만, 나는 이 순간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고통을 겪는 이를 위로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고통을 겪은 이의 입장에 완전하게 일치되는 것이리라. 그것은 가능한가? 나는 네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최선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이가 슬픈 표정으로 떠난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까지 재난이 이야기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와 나>에서는 죽은 이가 살아남은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왜일까?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 살아있는 존재로서 망자들이 우리의 곁에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아닐까.
마지막으로, 인물들을 옆에서 숨 쉬는 사람처럼 만들고 깊은 감정의 진폭을 관객들에게 온전히 설득해내는 박혜수, 김시은 두 배우의 힘을 인상 깊게 느꼈다.
김시은 배우에게는 <너와 나>가 <다음 소희>보다 먼저 찍은 영화라고 한다. 이 배우가 출연한 두 영화가 내가 올해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좋았던 한국 영화 첫 번째와 두 번째다. 극도의 상실감부터 자살 직전의 우울감과 전혀 그 반대쪽의 발랄함과 즐거움까지 표현해야 하는 두 영화의 모든 순간에 김시은은 온전히 배역 그 자체였다. 이 사람은 정말로 재능 있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박혜수 배우는 학폭 논란으로 개인적인 부침이 있었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의혹 제기자들이 박혜수에 대해 명예를 훼손했다고 결론을 짓고 기소의견 송치했다고 한다. 이 논란이 여기에서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우리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셀럽이나 반-공인들에 대해 지나치게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는 평판을 회복하고 다시 활동할 기회를 줘야 사과도 반성도 원활해진다. ‘정의감 중독’이라 할만한 이런 현상도 우리 사회의 불건강함의 한 단면이라고 본다.
다시 돌아와서, <너와 나>에서 박혜수는 그간의 휴식기가 무색하다 할 정도로 좋은 역량을 보여준다. GV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 배우는 배역을 연기한다기보다 자신이 배역 자체가 될 수 있는 역할을 선택하는 것 같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배역 선택의 폭을 좁힐 수 있겠지만, 자신이 완전히 납득 가능한 배역을 만났을 때는 <너와 나>의 세미처럼 대단한 폭발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연기뿐 아니라 노래에 이르는 다양한 재능과 매력들을 펼쳐 보이고 오래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이 배우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