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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약

항해가 시작되는 곳 ②

by 재원


<항해가 시작되는 곳 ①>에서 이어집니다.



좋은 친구들은 참 많았던 때라 연말 연초에 위로차 만들어진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으며 좀 징징대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개발자가 될 것도 아닌데 컴공과 졸업장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다만 그간 낸 등록금도 아깝고 학자금 대출빚은 그대로인데 어디 서울대 졸업했다고 자랑까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좀 뒤틀렸을 뿐.


이제 가족도 집도 돈도 학벌도 애인도 없이 깔끔한 영점이었다. 오히려 생각이 맑아지고 그간 고민하던 많은 길들에 대한 용기가 생겨났다.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순수한 내 관심사를 향해 모험할 수 있었다.


대학 방송에서 몇 차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꿈꿔왔던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카메라 한 대 들고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현장에 들어가서 오래 관찰하며 한 편의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잘하는 일을 통해서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뜻깊은 실천이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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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노무현 정부 주도로 ‘비정규직 보호법’이 통과됐다. 핵심적인 내용은 한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2년 이상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법 시행을 앞두고 모두가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기업들이 자기 회사에서 2년 이상 일해온 비정규직들을 전부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규직 전환을 막기 위한 꼼수였다. 비정규직 보호법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쫓겨나는 황당한 일들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울산의 삼성 SDI 공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여기는 직접 고용 비정규직도 얼마 없었고 ‘사내 하청’이라는 간접적인 비정규직이 많았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데도 누구는 ㄱ전자, 누구는 ㄴ비트, 누구는 ㄷ실업 소속이었다. 당시 삼성은 사내 하청 기업을 폐업시키는 형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거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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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공장의 해고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십 대 내 또래들이었다.


내가 수능을 치고 대학에 들어가 빛나는 청춘을 보낼 때, 이 친구들은 고교 졸업 후 공장에 들어갔다. 형편이 안 좋아 대학을 꿈꿀 수 없었던 어떤 청춘들은 그렇게 젊음을 갈아서 돈을 벌었다. 그래도 가족들 건사한다는 보람으로 일해왔는데 갑자기 쫓겨난 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간단한 짐을 싸서 울산으로 내려갔다. 공장 이름에 울산이 들어가 있어서 접근성이 좋을 줄 알았는데, 터미널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변두리였다.


도착하니 밤이었다. 벌판에 부는 바람이 몹시 추웠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공장 앞 길바닥에 쳐놓은 천막이 보였다. 그 얼기설기한 비닐을 젖히고 들어갔을 때 모여있던 앳된 얼굴들과 그곳의 온기가 지금도 느껴진다.


불쑥 찾아간 입장에서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였다. 정식 언론사 기자도 아니었지만, 서울에서 대학생이 카메라를 가지고 와줬다며 다들 고마워하며 반겨주었다.


그만큼이나 세상이 외면했던 이십 대 청년들의 복직 투쟁이었다.



한동안 울산에서 같이 지냈다.


스물한 살이 된 작달막하고 얼굴이 동그란 동생이 새벽 출근시간 동안 피켓을 들고 서있으면, 얼굴이 창백한 스물여섯 누나가 긴 생머리를 털모자 속으로 밀어 넣고 나가서 교대로 피켓을 들어주었다. 입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런 얼굴들을 나는 건너편에서 카메라로 담았다.


클로즈업해서 보면 평범하게 친구들과 매운 떡볶이나 먹으며 수다 떨 것 같은 사람들인데. 투쟁 조끼를 입고 붉은색 머리끈을 매고 부당 해고 ‘분쇄’나 ‘결사 투쟁’ 같은 낯선 단어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지나가는 정규직 아저씨들 앞에서 최대한 굳건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는 모습.


내 카메라에는 그런 순간들이 담겼다. 찍어야 할 컷들을 다 담아놓고서도 그들을 두고 혼자 천막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계속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돌리곤 했다.


몇 있던 동갑내기들과는 깊이 친해졌다. 이들과 인터뷰를 하겠답시고 카메라를 켜고 말을 시작하면 금세 촬영인 걸 잊고 잡담이나 수다가 이어졌다. 하루는 ‘너 공장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맡게 되는 거야?’ 같은 질문을 생각 없이 던졌다가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야! 공장이 뭐고, 회사라고 해야제!


이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정말 배우는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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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삼성그룹 핵심에서 법무실장으로 일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이건희 일가의 비자금을 폭로해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차명 계좌에 숨겨진 돈은 특검을 통해 밝혀진 것만 4조 5천억 원에 이르렀다.


울산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 같은 저임금 비정규직은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면서 뒤로는 수십 억짜리 미술품으로 재산을 은닉하고 당연히 내야 할 세금까지 떼먹은 셈이었다.


image.png 2008년 4월, 삼성 특검에 출석한 홍라희씨. 비자금 조성에는 홍씨가 관장인 삼성 리움 미술관 소장품들이 이용되었다. 뒤에 우리가 들고있던 피켓이 보인다.


울산 변두리 공장 앞에서의 복직 투쟁이 별다른 진전이 없자, 해고자들은 서울의 삼성 본사나 비자금 특검이 이뤄지던 한남동 등으로 투쟁의 장소를 옮겼다.


나는 울산에서 카메라를 든 관찰자로 시작했지만 그들이 서울에 오고 나서는 길도 안내하고 피켓도 나눠 들면서 일행처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다시 울산에 내려가면 해고자들을 돕는 금속노조 형님들과 숙소도 함께 쓰고 술자리도 같이 다니며 복직 투쟁하는 친구들과 섞여서 살았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온 대학언론 피디라는 외부자의 눈으로 그들을 관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친구들의 눈으로 외부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이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런 삶에 대해 흘러가는 기사에서나 접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공장에 취직해서 하루 종일 화학 약품을 다루며 서서 일하다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문자로 그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는 어떤 동시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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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더 이상 관찰 대상이 아니라 함께 울고 웃는 친구가 되니 내 정체성의 일부가 그들이 되었다. 그러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원래 내가 알던 세상은 노력하는 만큼 얻고 고생하는 만큼 이루는 곳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는 세상은 평생 벗어나기 어려운 빈곤 속에서 무엇 하나 이루기 힘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불평등과 차별이 발목을 잡는 숨막히는 곳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며 상대적으로 의식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던 내 발밑에는 거대한 특권이 깔려 있었다.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질좋은 교육을 받고 서울대에 입학한 비장애인 남성인 나는 넉넉한 순풍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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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기업을 상대로 하는 복직 투쟁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시간과 돈이 많은 사측은 별다른 전략을 쓰지도 않는다. 이때도 사측은 그저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생계 문제 때문에 점차 사람들이 이탈했다.


백여 명이 시작했던 복직투쟁도 겨우 스무 명 남짓이 남았다. 혹독한 겨울이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발표하기 위해 잠시 편집에 파묻혔다.


그리고 찾아온 대망의 발표회 날...


해고자 노조 대표 세진 누나와 사무국장, 동갑내기 친구들, 금속노조 형님까지 여섯 명이 서울에 올라왔다. 상영 장소에는 대학생 이백여 명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잠시 암전 후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갑작스런 해고 통보 직후, 굳게 닫힌 공장 입구를 열어보려고 문에 달라붙은 수십 명 해고자들을 용역 경비들이 떼어내고 던져버리고... 아수라장 같은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천막을 세우고 피켓을 들고, 울산과 서울을 오가며 부지런히 담담하게 싸워나가는 이야기.


지금 기준으로 보면 투박하고 어설픈 작품이었다. 그래도 많은 관객이 세상 어딘가 이런 힘든 싸움을 하는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미안해했고, 눈물을 닦는 사람도 여럿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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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이 끝나고 세진 누나에게 잠시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을 드렸다.


누나가 마이크를 잡자 많은 사람들이 박수로 지지를 보냈다. 지쳐가던 시간에 여러분의 이런 마음이 큰 힘이 된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작은 체구의 누나가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앞서 등장 때보다 더 큰 박수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내게는 오래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상영회를 마치고 같이 저녁을 먹으며 남은 소감을 나눴다. 그러고 나는 학교 사람들과 뒤풀이를 하러 가려는데 세진 누나와 동료들이 줄게 있다며 나를 불러 세웠다. 내게 내미는 손에 자그마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들려있었다. 그 낯선 거리를 분주하게 뒤져서 선물을 사온 것이다.


순간 코 끝이 찡해졌는데 아닌척 하려고 괜히 구시렁댔다. 아니 돈도 없는 사람들이.. 올라오는 차비도 많이 들었을 텐데... 웬 선물이에요.


주는 사람들은 환하게 웃는데 받는 나는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떤 선물이 그만한 무게로 다가오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트리에 별처럼 박혀있던 작은 불빛들이 지금도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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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손짓에 풍향이 바뀐다.

나는 이듬해부터 시민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항해가 시작되는 곳 ③>에서 이어집니다.


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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