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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약

항해가 시작되는 곳 ③

by 재원


<항해가 시작되는 곳 ②>에서 이어집니다.



그즈음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뒤 여러 문제로 정국이 어수선했다. 봄부터 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어 촛불을 들었다.


나는 집회를 운영하고 지원하는 시민단체의 총무일을 하면서 여러 살림을 맡았다. 시민 후원금을 관리하고, 양초와 종이컵을 만드는 공장을 섭외해서 주말 집회에 수십만 개의 물량을 차질 없이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기사)


동시에 대규모 집회에 필수적인 무대차나 오디오 장비를 섭외해야 했다. 여기에는 복잡한 전략이 필요했다. 경찰이 집회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방향의 행진을 막으려고 경찰이 광화문 세운 '명박산성'은 지금도 불통의 상징으로 종종 회자된다.)


IE000923972_BIG.jpeg 명박산성 © 오마이뉴스 (2008)


집회 시작 전에 경찰 차벽이나 전경들을 뚫고 필요한 장비들을 공수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압수수색을 피해 다음 집회 때까지 안전하게 물품을 간수하는 것도 일이었다.


나는 집회가 끝나면 스타렉스에 급하게 오디오 장비를 싣고 차선을 어지럽게 바꿔가며 도주했다. 정보과 형사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미리 약속이 된 여러 대학 학생회실에 가서 오디오 장비를 숨기고, 현장 모금함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동료들과 모금액을 정리하고 금고에 넣은 뒤에는 종로나 명동 근처의 병원을 돌았다.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던 시민들이 종종 전경과의 몸싸움에서 다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상자 의료비 결제를 위해 응급실을 한번 돌고 나면 해가 뜨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 상태에서 몇 달간 현장을 지켰다. 주말이 가장 바쁘다 보니 쉴 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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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집회를 앞두고 양초와 종이컵을 스타렉스에 가득 싣고 시청 광장으로 출발했다. 이미 경찰과 인파로 꽉 막힌 광화문 사거리를 피해 대학로를 지나는 중이었다. 차가 너무 막혀서 가다 서다 하면서 졸고 말았다.


쾅. 앞에서 유턴하던 혼다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상대 운전자는 촛불 집회에 가는 길이어서 내 졸음운전도 이해해 주셨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운전자분께도 죄송하고 내 잘못으로 ‘촛불 없는 촛불 집회’가 될 뻔했던 아찔한 사건이었다.


권력자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할 때 직접 거리로 나와서 주권을 행사하는 시민들의 모습. 그 촛불의 물결이 주는 감동은 분명히 뜨거웠다.


하지만 활동가로서 나는 점차 번아웃이 되어갔다. 차 사고 같은 사소한 일들이 마음을 더욱 지치게 했다. 교통비 수준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알바를 병행해야 하는 것도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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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께가 되면서 정부의 강력한 시위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언론은 감정이 격앙된 일부 참가자들이 경찰과 부딪히는 모습을 자주 보도했다. 그런 사진이나 기사를 보면 거의 이성을 상실한 폭력배들이 집회의 주도세력으로 보였다.


그러자 가족 단위로 소풍처럼 나오던 평화적인 촛불 집회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다.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던 정부는 바뀐 여론의 분위기를 감지하자 집회 주최 측을 강력히 탄압했다. 조직을 이끌던 선배들에게 모두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수배령에 어떻게 대응할지 내부에서 격론을 벌였지만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결국 뿔뿔이 흩어져서 일부는 어딘가로 숨고 일부는 조계사 등 경찰이 침탈하기 어려운 종교 시설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나는 아직 집회시위법 위반 등 전과가 없던 터라 수배까지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검찰이 만든 ‘불법 촛불집회 배후세력 체계도’에 버젓이 주동세력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공식 후원계좌가 내 명의로 되어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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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손발이 묶이고 일이 줄어들면서 나도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왔다.


집회가 한창일 때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 있었다. 중앙에서 주도하는 판이 끝난 후 광화문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대로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여름밤 곳곳에서 둥그렇게 자리를 만들어 토론을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언론은 공론장에 정확한 사실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들은 그 팩트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토론하고, 그러면서 선거, 노동 쟁의, 집회 시위 등 여러 정치적 판단과 선택을 통해 국가의 주인으로 역할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당시에 나는 그런 일면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내가 어디에 기여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나는 언론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오래 해왔고 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디 저널리즘’이라고 불리던 탐사보도 프로그램들이 권력을 비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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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사교양 피디를 뽑는 방송국에 입사하려면 소위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높은 경쟁률의 시험을 뚫어야 했다.


만약 잘 준비해서 시험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최종 단계에서 여러 경로로 신원조회를 하면 ‘불법 집회 주동자’라는 낙인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훗날 실제로 겪었다.)


당시 언론사에서는 권력을 비판하는 공정한 보도를 하려는 언론인들이 연이어 해고되거나 징계를 받았고, 면접장에서는 지원자의 사상을 검증하는 경우도 있던 터였다.


더 큰 문제는 내 학력이었다. 대학에서 제적되어 고졸 학력에 불과한 나를 언론사에서 뽑아줄까? 다시 수능을 봐야 하나?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그러면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었다.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며 잘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길을 놓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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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신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뉴스 채널에서 서울대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원래 서울대에서 성적불량으로 제적된 학생은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이 매년 백여 명씩 나오자 학사 규정을 바꿨다는 소식이었다. 1회에 한해 재입학을 허용하고 기존에 이수한 학점도 복원해 준다고 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주변의 모든 소리들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일개 대학이 학사규정을 바꾼다는 소식이 무슨 뉴스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뉴스가 아니었다면 복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학교에서 나 같은 학생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과사무실에 전화해서 재차 사실임을 확인했다.


결국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 친구들은 끝내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복직이 좌절됐을 뿐 아니라 재취업도 어려웠다.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복직 투쟁을 한 노조원들을 다른 회사에서 고의적으로 안 뽑는다는 얘기였다. 누군가는 멀리 떠나서야 작은 공장에 자리를 잡았고, 그마저 안되면 자영업자가 되거나 직장을 포기하고 애엄마가 되었다.





비슷한 일들이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쌍용자동차를 매수한 외국 자본이 2600여 명의 노동자를 구조조정했다. 해고 위기에 놓인 노동자들은 평택 공장 입구를 막고 파업에 돌입했다.


극한 대치 끝에 경찰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된 군사작전 수준의 강경 진압으로 파업 노동자들을 끌어냈다. 경찰도 여럿 다쳤을 정도로 전쟁 같은 작전이었다. 10년 후 경찰청장은 이때의 폭력 진압에 대해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사과했다.


오징어게임의 주인공 성기훈은 쌍용차가 모티브가 된 ‘드래곤모터스’ 해고와 파업 이후 힘들게 살다가 게임에 응한다.


하지만 뒤늦은 사과였다.


온 몸을 얻어맞고 끌려갔던 진압 과정에서의 정신적 외상은 해고자들의 마음에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파업 이후 재취업이 막히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이어지면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 중 30여 명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회적 참사'라는 건조한 말로밖에 표현을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는 커뮤니티를 여러 차례 찾았다. 내가 언론사에 입사한 2014년에는 쌍용차의 부당해고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대법원 판결이 있기도 했다.


그날 나도 취재를 핑계로 함께 있었다. 해고자들이 재판정 입구에 모여서 마지막 희망에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결국 해고가 합법이라는 선고가 나왔다. 편법이나 탈법일 순 있어도 불법은 아니라는, 절망적인 결과였다.


아저씨들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거친 손으로 틀어막고 낙엽이 지는 서초동 법원길을 내려오던 풍경...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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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도 그 이후에도 사장님과 노동자, 다수자와 소수자, 건물주와 세입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이 부딪히고 갈등하는 상황에서 약한 쪽이 이기는 걸 본적이 거의 없다.


돌아보면 그 추운 겨울에 삭막한 땅에서 농성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친구들이나 누나들, 쌍용차 형님들이 그 시절을 어떤 의미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지금의 일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어서 꿈처럼 덧없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그만두고 내 살길 찾았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작은 바람이 나 같은 평범한 대학생에게 불어오고, 돈이나 많이 벌고 맘 편히 살아보려던 사람의 항로를 바꿔놓았다는 것. 그분들이 삶을 돌아볼 때 작은 의미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분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남과 다른 본질이란 나만이 가진 한 줌의 기억에서 초래하며, 불확실하고 변해가는 세상에서 이런 기억들이야말로 가야할 길을 짚어주는 별자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시간들이 항해가 시작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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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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