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쪽의 낡은 동네, 붐비는 사람들 틈으로 4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상가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오래 안 씻은 몸처럼 땟국물이 흐르는 누런 벽돌 건물에는 전선들이 넝마처럼 늘어져 있었다. 언제 합선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건물 3층에 교회가 있었다. 먹구름마저 희미해질 만큼 빛이 사위어가는 시각. 시트지로 조악하게 가로막은 창문 틈으로 맹렬한 빛이 새어 나왔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밀이 거기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사이사이 누군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 자매
열흘 째 이어지는 열대야에 잠을 설치고 출근했던 날이었다. 오후에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책상 위에 둔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거세게 울렸다. 화들짝 놀라 전화를 집어 들었다. 친하게 지내는 엄 변호사님이었다.
"음... 성폭행 사건을 하나 알게 됐는데... 아빠가 범인이래. 근데 경찰이 좀 미적거리는 거 같아서. 정 피디 관심 있어?"
"경찰 입장에서도 큰 껀일 텐데 왜 그런대요?"
"아빠란 인물이 그쪽에서 힘깨나 쓴다나봐."
사건 개요를 대강 듣고 전화를 끊었다.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니라 세 자매라고 했다. 곧 찾아뵙기로 하고 구글에 그 아빠라는 자의 이름을 쳐봤다. 기사가 여러 개 떴다.
지역에서 의사협회장과 3선 국회의원의 후원회장까지 역임하고, 이제는 시장 출마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도지사나 의원, 경찰서장 등과 사진 찍으며 웃는 관상에 야심이 흘렀다.
‘점잖게 생긴 양반이 쥐새끼만도 못한 짓을...’
이름 이윤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오십 대 후반 남성. 머리가 희끗하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 생긴 얼굴. 지역 거점 병원의 원장으로 명망이 높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지역 사회에 봉사 이력도 뚜렷했다. 그리고
세 딸을 어릴 때부터 스무 살이 넘는 지금까지 성폭행하고 낙태까지 시켰다는 얘기였다.
사건이 드러난 계기는 이러했다. 세 딸 중 다소 장애가 있던 막내가 성인이 되면서 취업을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먼저 올라와있던 언니들과 같이 집을 얻어 지내던 중, 우연한 계기에 둘째가 막내의 일을 알게 됐다.
그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둘째가 윗 언니와 이야기하다가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 자매는 엄마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고 엄마는 즉시 짐을 싸서 서울의 딸들에게 왔다. 함께 다니던 교회에 때마침 검찰 출신의 장로님이 있어서, 그의 도움을 얻어 아버지를 고소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경찰은 정식 수사를 차일피일 미뤘다. 이렇게 큰 사건에 구체적인 진술까지 있었는데도 그랬다. 공소시효도 지나지 않았고 복수의 피해자가 모두 한 명의 가해자를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는데... 정말 이해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자매들은 성폭력 분야에서 유명한 엄 변호사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늘 이런 사건에 자기 일처럼 나서는 엄 변호사님은 즉시 발품을 팔아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돌아본 뒤 내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사건이 세상에 좀 알려져야 경찰이 제대로 수사에 나설 것 같다는 말이었다. 나 역시 어떻게든 세 자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10년 전,
군산
논밭으로 둘러싸인 한 시골마을에 홀로 우뚝 솟은 흰 건물이 있었다. 첨탑 위 흰 십자가가 기세를 뽐내며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쇠락한 마을과 교회 앞마당에 가득 모여있는 차들이 대비되는 특이한 풍경이었다.
밖에서 보이는 건물의 크기보다 예배당은 훨씬 널찍했다. 높은 층고를 따라 길쭉하게 낸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노랗고 빨간 빛 조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부옇게 일어나는 먼지가 빛을 맞이하듯 직선으로 도열했다.
그 자리는 어딘가 부흥회 같은 느낌이 났다. 신도 이백여명은 열광적으로 소리 지르고 손뼉을 치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목이 터져라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남자, 양손을 쳐들고 있느라 흐르는 눈물을 닦을 틈조차 없어 보이는 아주머니, 모습은 다양하지만 다들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 끝 단상 위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잘 다려진 푸른색 가운이 구두를 덮을 만큼 치렁거렸다. 짙은 화장을 한 초로의 여자였다. 그가 이 기도회를 주도하고 있는 목사였다. 목사가 손짓하자 맨 앞줄에 앉아있던 궁색한 차림의 노인이 주춤거리며 일어나 연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를 가리키며 목사가 소리쳤다.
“할렐루야! 성령께서 오늘도, 이 시간도, 이 자리에, 불같이, 바람같이, 기름부으심으로 임하고 계십니다, 아멘입니까?
성령의 권능으로 치유의 은사로, 우리 주님의 손길을 받은 귀한 간증이! 지금 이 시간 여러분 앞에 생생하게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여기 우리 형제님은요. 류마티스 관절염에 당뇨까지 겹쳐서... 끼니마다 독한 약을 스무 알 넘게 먹어야만 겨우 통증을 눌러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 기도회에서! 제가 그 무릎에 손을 얹고, 함께 부르짖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할렐루야, 즉각적인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이틀째 약을 하나도 안 드셨는데도, 통증이! 전혀! 없다고! 주님의 사랑이 임하셨습니다! 우리 기도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아멘 소리가 메아리치듯 몰려오고 군중들의 입에서 각자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흐느끼고 누군가는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목사가 다시 손짓을 하자 남자가 자리에 앉고 어느 여윈 여성이 걸어 나왔다. 그러자 기도 소리도 잦아들고 순식간에 고체적인 침묵이 들어찼다. 목마른 모두가 샘물처럼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두 번째 자매님은요, 여러분... 말기 대장암입니다. 3개월 전, 암 진단받으셨고.. 의사는 썩은 대장을 다 잘라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묻습니다.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 있습니까? 믿으십니까? 이 자매님은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 기도회 빠짐없이 오셨고, 물질로 기도로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화장실에서 종양을 다 쏟아내고! 지금은! 죽도 드실 수 있고, 쾌변에! 확연한 회복의 증거가, 그 몸 위에, 그 살 위에 임한 줄 믿습니다!”
파도 같은 기도의 물결이 다시 한번 몰아쳤다. 찬양팀이 기타를 휘몰아치자 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그 기세를 모아 목사가 두 배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할렐루야! 성령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그 치유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일하시며, 저에게 기도의 은사, 치유의 은사, 그리고 때로는 직통으로 부어지는 계시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병이 떠나가고! 귀신이 떠나가고! 영이 회복되고! 영광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다 함께 외쳐볼까요? 할렐루야! 아멘!”
예배석 뒤편 구석에 세 딸과 나란히 앉은 엄마가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는 막내딸의 손을 꼭 잡고 오른손은 허공으로 쳐들고 연신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내는 초점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기억의 미로 ② 가계저주>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제가 취재했던 실화입니다. 신원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 성별이나 나이대, 지역을 바꾸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사 자료와 판결문, 직접 취재한 경험과 사실에 기초하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픽션이 들어갔음을 밝힙니다. 총 10편에 걸쳐 이어집니다.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