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미로 ② 가계저주

by 재원


고백의 증거


사건 취재의 기본은 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듣는 것이다. 다만 이 사건에서는 피해자들이 워낙 긴 시간 끔찍한 범행을 당해왔기에 그들이 증언 자체를 힘겨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 자매로부터 가장 먼저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는 박희 집사를 만나보기로 했다.


세 자매는 서울 남쪽 어느 변두리 동네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세 자매의 낯선 서울 생활에 안식처 같은 공간이라고 했다. 그 교회에서 사역해온 박희 집사는 과거 경남 지역에서 성폭력 상담소 상담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이런 전문성을 살려 세 자매의 피해 사실을 정리하고 고소에 이르기까지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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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가 전화로 연락을 했을 때 세 자매가 얼마나 심각한 일들을 겪었는지 흥분하며 말했던 박희 집사는 막상 만나자고 청하자 선뜻 내켜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방송국 피디와의 만남을 충분히 꺼릴 수 있으므로 나는 계속 설득했다.


그러자 겨우 시간을 내주었다.


교회 근처의 작고 허름한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시켜놓고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 박 집사가 나타났다. 숏커트에 온몸에 거의 살이 없다 할 정도로 마른 체형의 오십대 여성이었다. 한평생 자신을 꾸며보거나 내세워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인상... 사회와의 접점이 아주 좁아 보였다.


나는 세 자매의 고백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시간 순으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게 거의 한 1월부터 시작이 된 거예요. 처음에 세 자매는 자기들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인지 자체가 없었어요. 상담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고 친부 성폭력이라는 건 한참 뒤에서야 끌어낸 거예요. 처음에는 알코올 중독이나 자위, 그리고 자극점이 멈춰지지 않는다... 이런 성적인 것들 회개하라고 상담하는 과정에서 친부 성폭력까지 역으로 끌어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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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는 성폭력 피해를 무의식 속에 억누른 채로 살아왔다고 한다. 박 집사에 따르면, 자신이 성폭력 상담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세 자매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몇 달 동안 마라톤처럼 상담을 이어간 끝에 결국 친부 성폭력이 있었다는 고백을 이끌어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자극점이 뭐죠?”


“그게 중요한 거예요 피디님, 이 딸들이 중년 남성한테 계속 성폭행을 당하다 보니까 그 자극에 길들여져서 계속 이런저런 자극을 추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위하고 술 마시고 음란 화상채팅 하고... 이 아이들이 센서가 다 고장 나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성폭행을 당해온 피해자가 심리적 붕괴로 잠시 일탈적 행위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위나 음주, 화상채팅 같은 흔한 행위를 그런 일탈의 징후로 볼 수 있을까? 또한, 성폭행은 인간을 짓밟는 폭력인데 그것을 어느 순간에는 피해자가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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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이 사건을 아직 깊이 있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단 잠자코 말을 들었다.


“이걸 세 딸이 말하기 굉장히 힘들어했던 지점이 있어요. 피디님, 사실 최근까지도 성관계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해서 아빠를 찾아갔다... 이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 피해 사실을 극도로 오픈을 못했습니다. 근데 저희가 이건 그루밍이다, 너를 길들인 거다, 너는 자극에 길들여진 것뿐이다... 끊임없이 저희가 얘기를 해서 오픈을 하게 된 거예요.”


이미 성인이 된 첫째와 둘째 딸은 서울에서 지냈지만, 가끔 아빠와 성관계를 하기 위해 스스로 렌터카를 빌려 몰래 고향에 가거나, 아니면 서울의 호텔을 직접 예약했다고 한다. 평소 심리적 지배를 당하는 인간이 얼마나 기형적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익히 봐왔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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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물었다.


“혹시 진술 외에 확보하신 증거가 있나요? 딸들과 대화하면서 아빠가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듯한 녹취나, 아니면 아까 말씀하신 렌터카나 호텔 예약 내역이나… 아니면 예전에 했다는 낙태 의료 기록이라도요.”


“그런 것들은 수사하면서 경찰이 다 찾아낼 거고요. 전부 사실인데 시간문제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피디님, 세 명이에요, 세 딸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요. 첫째 둘째 다 서울 명문대 나와서 공기업에 번듯한 회사 다니고 똑똑한 애들이에요. 같은 아빠 밑에서 세 딸이 같은 증언을 하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나는 박 집사의 말에 어딘가 허술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증언한다고 해도 ‘증거가 뭐가 필요하냐’며 막무가내로 나오는 사람의 말은 약간 거리를 두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박 집사의 말대로, 독립적인 성인 세 명이 동시에 피해사실을 증언하는데 그것이 거짓말일 수가 있을까? 성폭력 사건은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단 한 명의 증언이라도 일관되고 구체적이면 법정에서도 강력한 증거능력을 갖는 터였다.


일단 세 딸을 만나봐야 했다.




10년 전,
군산


목사는 연단 앞으로 여러 노인들을 불러내 그들이 겪은 치유의 기적을 부르짖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치유의 권능으로 불치병을 고친다는 기적 앞에 몸과 마음이 병든 이들이 몰려들었다. 구원을 기도하는 이들에게 목사는 이미 신이었다.


이윽고 목사는 기도회를 마무리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여러분 다들 아시죠? 마귀들이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공격하고 있다는 걸요. 마귀가 인간에게 내리는 저주는 끝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게 차곡차곡 쌓이고 유전적인 통로를 따라서 조상들로부터 가족들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저주입니까! 가족의 이름을, 성씨를 벗어날 수 없다면, 저주의 사슬이 우리를 지옥으로 끌어갈 겁니다!”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목사는 연단을 주먹으로 거세게 내리치며 의도적으로 침묵을 깼다.


“여러분, 가문의 영을 쫓아내야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의 믿음을 탄압합니까? 악귀가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벗어나려 할 때 악귀는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누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짓부수려 할 겁니다. 믿음으로 나아가세요! 할렐루야! 죄의 뿌리를 끊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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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가 다시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저주가 가족들로부터 온다는 설교를 듣던 세 딸의 엄마는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편은 자신이 딸들을 데리고 군산 기도회에 다니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몇 번은 정말 마귀가 씐 것처럼 본 적 없는 얼굴로 화를 내며 기도회를 다니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다니고 싶으면 딸 애들은 집에 두고 가라고 말했다.


남편은 군산 기도회를 이끄는 목사가 사이비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시를 하고 치유 기도회를 여는 것이 전형적인 이단의 특징이라고 했다. 가족과 조상이 죄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가계저주론이라는 이단 교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 딸의 엄마는 믿었다. 구원자가 나타났을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진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과 은사에 그녀는 천국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이십여 년 넘는 숨 막히는 가정생활 끝에 비로소 빛을 찾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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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다시 막내의 손을 꼭 잡았다. 태어날 때부터 자폐와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 첫째와 둘째가 모든 축복을 독차지해서, 마치 하나님이 절묘한 균형을 맞추려 욥과 같은 고난을 준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막내딸도 세속의 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는 기적을 맞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이 치유의 기도회가 무척이나 소중하고 간절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예배당 뒤쪽의 문이 열리며 큰 소란이 일어났다. 막내의 얼굴을 끌어안으며 뒤쪽을 돌아봤다. 남자 신도들이 누군가와 몸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 저기...!”


첫째 딸이 가리키는 곳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 미친 사기꾼 놈들아! 하나님이 치유의 능력을 줬다고? 그따위 거짓말로 사람들 속이고 교회를 욕보이는 너희! 사탄이 누구에게 씌었느냐, 더러운 죄로 지옥불에 떨어질 거다 이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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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틀어막고 몸을 잡아채는 남신도들과 엉겨서 꼿꼿하게 목청을 높이는 남자는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었다.





<기억의 미로 ③ 불자국>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제가 취재했던 실화입니다. 신원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 성별이나 나이대, 지역을 바꾸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사 자료와 판결문, 직접 취재한 경험과 사실에 기초하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픽션이 들어갔음을 밝힙니다. 총 10편에 걸쳐 이어집니다.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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