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김범진 선교사
코 끝에 짠내가 물씬 밀려드는 부산 항구의 오래된 카페.
구석 자리에 사십 대 후반 남성이 앉아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흰머리가 간간이 보이는 차분한 인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나눴다. 이윤회 원장이 나에게 꼭 만나보라고 했던 김범진 선교사였다. 안경 너머 눈매에서 뜻밖의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전해 듣기로 그는 이십여 년 전 서울의 한 명문대를 졸업한 뒤 유망한 기업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속의 길과 종교인의 길을 두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스코틀랜드로 출국해서 지금까지 선교사로 일해왔다고 했다.
한동안 한국에 들어올 일도 없던 터였다. 그런데 올초 조카를 하늘문 교회에서 구해달라는 누나 부부의 요청을 받고 잠시 입국했다가 발이 묶여버렸다. 어릴 때부터 아껴왔던 조카 예린이가 자신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제가 젊어서 누나네 하고 같이 살았어요. 예린이 애기 때부터 얼마나 살갑게 지냈는지 몰라요. 각별하게 저를 따르기도 했고요. 집안에 처음 온 아이다 보니까 제 자식들 이상으로 예린이한테는 애틋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랬던 예린이가 이제 부모의 연락조차 받지 않고 있었다. 가족을 끔찍한 범죄 피의자로 지목한 뒤 완전히 차단한 아이들. 김범진 선교사도 이윤회 원장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걸 오기억 현상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진짜라고 확신하게 되는 상태죠.”
“오기억 현상이라... 처음 듣네요. 세뇌랑 비슷한 거라고 보십니까? 사이비 종교에서 교주가 신도들을 세뇌해서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문제가 많았는데요.”
“세뇌랑은 달라요. 세뇌는 압박적이고 폐쇄된 상황에서 사람의 신념이나 행동이 바뀌는 겁니다. 오기억 현상은 생각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 대한 기억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럼 하늘문 교회 사람들이 비슷한 오기억을 갖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여전히 어느 쪽에 대해서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놀라운 얘기를 거듭해서 듣는 터라 한쪽 말을 덥석 믿기가 어렵기도 했다. 삐딱한 마음을 숨기며 질문했지만 아마 김범진 선교사도 거리를 두려는 내 태도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식어가는 커피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차분히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해외에는 1980년대부터 널리 알려진 오기억 사건들이 있었어요. 지금 하늘문 교회 상황이 그때하고 똑같아요.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어리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청년들에게 유도나 암시를 하는 겁니다.
하늘문 교회에서도 강문석 장로나 구미영 권사, 박희 집사 같은 사람들이 스무 살 전후 젊고 어린 교인들한테 이상한 말을 정말 많이 했어요. 마치 자신들이 본 변태적인 포르노그래피의 환상을 암시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포르노요?”
“네, 예를 들어 어떤 남자애가 상담을 하면서 여자한테 다가가는 게 어렵다고 말해요. 그러면 권사나 집사가 너 어렸을 때 어머니나 누나하고 성관계한 경험이 있을 거라고, 잘 기억해오라는 숙제를 내주는 식이에요. 혹은 포르노를 봤다, 자위를 했다고 하면 그건 강간을 당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짓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리더들이 왜 이런 기억을 심었는지는 나중에 수사기관이 밝혀야겠지만... 질문자가 그런 암시를 해서 아이들이 없던 기억을 갖게 됐다는 건 확실합니다.”
금욕의 끝판왕 같았던 박희 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성뿐 아니라 교회 밖 어떤 타인과도 교류하지 않아 본 것 같은 폐쇄적인 인상의 옷차림과 태도. 무언가 비틀린 욕구가 그 인상 너머에 있었던 걸까.
“장로나 권사, 집사 같은 사람들이 그럴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청년 교인들은 꽤 똑똑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거든요. 다들 대학 교육도 받고 번듯한 직업이 있는 청년들이 다수라고 하던데요. 이런 비상식적인 말이 어떻게 흡수됐을까요?”
“이 친구들이 뿌리 깊은 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걸 이해하셔야 해요. 청년들은 구미영 권사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듣고, 강문석 장로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지금도 믿어요.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십니까?
성경에 보면 음행은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거라고 쓰여있어요. 장로나 권사는 그 죄의식을 자극했죠. 청년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사소한 성적 충동이나 일탈도 다 죄라고 여겼을 겁니다.
그런 죄인인 자기들을 생각하면 괴로워 죽겠으니까... 죄인이 된 게 너희 잘못이 아니다... 부모나 형제가 너희를 성폭행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죄의 뿌리다... 너희가 가족들하고 연을 끊고 죄를 고백하면 구원해 주겠다... 이런 황당한 암시에도 강한 영향을 받는 겁니다. 이들에게 장로나 권사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였을 거예요.”
현실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신’이라는 단어는 당혹스럽다.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단어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신비가 일어난다. 이것 또한 인간 세계에서 종교의 권능인가.
김범진 선교사의 설명에는 합당한 부분이 있었다. 이제 신비의 장막을 거둬내기 위해 좀 더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서울,
이중맹검
취재와 제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억울한 부모나 형제들이 끔찍한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지는 일을 막아야 했다. 청년들에게 계속해서 오기억을 심고 가족을 파렴치한 범죄자로 만드는 교회에 대한 폭로도 서둘러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세 자매를 비롯한 어떤 청년들의 경우 정말로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복잡한 퍼즐이었다.
나는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진술분석가 채수현 선생님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 범죄심리학 박사이자 대검찰청에서 진술분석관으로 일하다가 민간에 나온 후 우리의 일을 종종 돕고 있는 분이었다.
일종의 이중맹검(double-blind) 구도를 만들었다. 이중맹검은 의학 혹은 심리학에서 쓰는 용어인데, 실험자와 피실험자 모두가 실험의 의도를 모르게 해서 편향을 줄이는 것이다.
지난 인터뷰에서 세 자매 중 가장 적극적으로 기억을 꺼내 보여주었던 첫째 딸 유정씨를 불렀다. 나는 채수현 선생님에게도, 유정씨에게도 이 자리에서 검증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성폭력 사건 프로파일링에 필요한 기본적인 대화를 나누고, 선생님께는 진술의 신뢰성을 파악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정씨를 선생님의 상담실로 들여보내고 같이 온 어머니와 나는 근처 카페에서 기다렸다. 통유리창 바깥의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문가에 옹기종기 놓인 식물들이 산들거렸다.
그 배경으로 홀로 흑백이 된 듯한 어머니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피디님, 우리 유정이가 얘기 잘하고 나올 수 있겠죠...?”
“그럼요. 지난번에도 똑 부러지게 말씀하셨잖아요.”
“애들 아빠 만나보셨다면서요. 뭐라고 또... 둘러대던가요?”
“네 뭐... 그냥 뻔한 변명이었어요. 자기는 잘못 없다고...”
나는 어머니에게 모른 척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속으로는 진술을 믿지 않아서 검증하는 판을 깔아놓고, 겉으로는 당신들의 주장을 싣는 방송을 준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딸들을 지켜내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온 사람을 잠시 속여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진실뿐이었다. 그 점이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금은 정돈해 주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 지 세 시간째. 진술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와 유정씨를 돌려보내고 채수현 선생님과 상담실에 마주 앉았다. 선생님이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피디님, 이거... 사실이 아닌 것 같아요.”
아버지한테 성폭행을 당했다는 유정씨의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 퍼즐이 살짝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확인한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함구하고 잠자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이 객관적으로 판단한 바를 들어보고 싶었다.
“유정씨가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감정이 없어요... 아시겠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보통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할 때 감정 동요가 엄청 심하거든요.
그리고 겪은 일에 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에요. 네다섯 살 때 일을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어요. 뭔가 실제 겪은 일을 말하는 구체성이 아니라 포르노 영상 같은 걸 보고 말하는 느낌의 구체성이에요. 자기가 겪은 폭력이 아닌 느낌이랄까요?”
“그럼 뭐죠? 겪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술을 하는 거예요? 구체성뿐 아니라 일관성까지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오기억 현상이라는 게 있어요.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을 기억으로 가지는 증상이에요. 제 생각엔 교회에서 어떤 유도나 암시를 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이거 엮인 사람들도 많고 보통 일이 아닌데요.”
오기억. 김범진 선교사한테 들었던 말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신비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의 미로 ⑧ 진실유도제>에서 계속됩니다.
이 글은 제가 취재했던 실화입니다. 신원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 성별이나 나이대, 지역을 바꾸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사 자료와 판결문, 직접 취재한 경험과 사실에 기초하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픽션이 들어갔음을 밝힙니다. 총 10편에 걸쳐 이어집니다.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