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억 현상이라... 사람이 겪어본 적 없는 일을 기억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아서요. 이게 학술적으로 입증이 된 개념이에요?”
“그럼요. 1980년대부터 미국이나 영국에서 오기억 현상 때문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 케이스들이 연구되면서 False memory syndrome이라는 용어로 정립이 됐죠. 질문자의 의도에 따라 듣는 이의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는 게 핵심이에요.”
채수현 선생님은 오기억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기억 연구가 알려진 후에 전 세계적으로 수사기관의 조사 기법이 크게 바뀌었다고 했다. 인간의 기억이 얇은 유리막처럼 투명하고 잘 부서진다는 사실을 심리학자들은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199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라모나 케이스를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아까 만났던 이유정씨와 비슷한 사건이라서요.”
선생님은 잠시 구글 검색을 하더니 모니터 화면에 앳된 대학생 사진을 띄웠다. 그러고는 길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1990년경,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던 홀리 라모나(Holly Ramona)는 심한 우울증과 섭식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근 병원에 상담 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기억을 떠올린다. 갑작스런 기억 때문에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던 홀리는 아버지를 고소한다.
아버지 게리 라모나(Gary Ramona)는 와인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며 당시 돈으로 약 50만 달러에 이르는 고액 연봉을 받던 성공한 전문 경영인이었다.
하지만 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면서 직장에서 해고되고 사회적 평판도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분노에 찬 아내와 세 딸이 자신을 떠난 것은 물론이다.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버지 게리뿐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는 딸이 거짓 기억을 갖게 된 원인을 절박하게 추적했다.
그러다가 딸이 다녔던 웨스턴 메디컬 센터의 의료 기록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소듐 아미탈(Sodium amytal)’이라는 약물이 상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딸에게 주사된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심리치료사가 여러 차례 ‘섭식장애 환자의 대부분이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다’는 암시를 했다는 증언을 확보한다.
딸을 담당했던 심리치료사 마르셰 이자벨라는 상담을 받으러 온 여러 소녀들에게 비슷한 암시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두운 경험을 바탕으로 갖게 된 편견이었다.
심리치료사가 상담 과정에서 소녀들에게 주사한 소듐 아미탈은 소위 '진실혈청'으로 불리는 약물이다. 신경정신과 영역에서 한때 쓰였던 약물로, 뇌의 중추신경을 억제해서 불안을 줄이고 최면 효과를 낸다.
이 주사를 맞으면 판단력이 약화되고 말이나 기억을 쉽게 쏟아낸다. 그래서 ‘진실혈청’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당시에도 소듐 아미탈을 투여한 뒤 나온 진술에 대해 신뢰성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심리치료사는 진실을 유도하는 약물을 사용했다.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어떤 기억이든 서둘러 토해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네가 겪는 우울증과 거식증은 전부 어린 시절에 당한 성적 학대 때문’이라는 암시를 거듭했다. 약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소녀의 내면에 뜻밖의 기억이 떠오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무죄를 밝히고 가족을 되찾기 위한 법정 투쟁을 시작한다. 심리치료사와 담당 의사가 잘못된 상담으로 딸에게 거짓 기억을 심었고, 이로 인해 가족, 직장, 사회적 명예를 잃었다는 내용의 800만 달러짜리 초대형 손해배상 소송이었다.
두 달간 이어진 소송에는 오기억 연구의 최고 권위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박사와 아동 트라우마 전문가 레노어 테어 등 당대에 손꼽히는 전문가들이 총출동해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리고 1994년 5월 14일, 배심원단은 10대 2의 압도적 비율로 아버지의 손을 들어줬다. 오기억 현상이라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성폭력 피고가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담당 판사는 재판이 끝난 후 “이토록 어렵고, 복잡하며, 흥미롭고, 설득력 있고, 매혹적인 사건은 처음이었다”는 평을 남겼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기억이 이토록 혼탁한 것이라면, 중대한 강력사건의 수사나 재판에서 증언자들의 진술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가. 혹은 주변의 누군가가 털어놓는 상처와 나쁜 사람들에 대한 분노에는 어디까지 공감해야 할까. 만약 그 진술과 상처와 분노의 원인이었던 기억이 가짜라면?
라모나 사건은 범죄심리학뿐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단단한 사실
채수현 선생님은 세 자매의 성폭력 기억이 떠오르게 된 과정에 주목했다. 2019년 초부터 교회에서는 지속적으로 ‘가족들의 성적 학대 때문에 너희에게 죄가 생겼다’는 암시를 했다. 그리고 죄를 씻으려면 기억부터 토해내라는 유도와 압박을 계속해온 상황이었다.
“이유정씨 말에 의하면 그해 봄에 ‘의식’이 있었어요. 성폭행을 당했음을 인정하지 않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기도 의식을 했고 그 후부터 아버지한테 당한 기억이 떠올랐다는 거예요.”
기도 의식이 있었다는 말은 인터뷰 때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 종교적 의례가 오기억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채수현 선생님의 분석이었다.
“교인들이 여자 권사를 거의 신이라고 믿었잖아요. 카리스마가 넘치는 권사가 유정씨를 바닥에 눕혀놓고 얼굴을 흰 천으로 덮죠. 그리고 교인들이 빙 둘러앉아 지켜보게 한 뒤에 계속 기억을 토해내라고 압박해요. 강력한 의식이죠.”
권사는 기도 의식을 할 때 종교적 환상을 본다고 했다. 그 환상은 신이 권사에게만 내려주는 특별한 계시라고 교인들은 믿고 있었다.
“그렇게 환상을 읽고 해석해 주는 의례는 신비감과 충격을 줘요. 최면 효과가 있었을 거예요. 어찌 보면 이 순간이 라모나 사건의 ‘진실혈청’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최면에 걸리고 암시에 물드는 거예요.”
한편 ‘오기억 현상’을 일으킨 모든 배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경계해야 할 것이 있었다.
가족들한테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도들 대부분의 기억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중 누군가는 진실을 말했을 수 있지 않을까? 세 자매 중 누군가는 실제 성학대 경험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오기억 현상’은 끔찍한 범행을 은폐하는 질 좋은 장막이 된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채수현 선생님은 상냥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피디님, 너무 당연한 걱정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평소 잘하시는 걸 하셔야죠. 팩트 취재요.”
“팩트라면... 성폭력이 없었다는 증거 말씀이신가요?”
“네, 확인해 보세요. 진술에 보면 어릴 때 군산 보건소에서 낙태를 했다는 얘기가 있으니까 그 기록을 찾아볼 수도 있고요. 호텔에 갔다거나 렌터카를 예약했다고도 했으니 이런 기록도 한번 요청해 보세요. 근데 제 느낌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요.”
세게 말하고, 진지하게 소리치고, 심지어 울면서 털어놓으면 그 주장이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진실로 둔갑한 거짓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주입된 기억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 올릴 단단한 사실들이 필요했다.
<기억의 미로 ⑨ 신의 장난>에서 계속됩니다.
이 글은 제가 취재했던 실화입니다. 신원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 성별이나 나이대, 지역을 바꾸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사 자료와 판결문, 직접 취재한 경험과 사실에 기초하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픽션이 들어갔음을 밝힙니다. 총 10편에 걸쳐 이어집니다.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