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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미로 ⑨ 신의 장난

by 재원


검증


짙게 선팅된 검은 스타렉스 안에 숨어서 기다린지 두 시간째.


차 안에서 허름한 상가건물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눈이 아팠다. 상쾌한 바람을 기대하며 창문을 잠시 열었다. 썩은 생선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동네 마트 앞에 주차를 해뒀는데 매대에 생선이 삭아가는 모양이었다.


못 견디겠어서 잠시 차에서 내렸다.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어서인지 늦은 저녁시간인데도 사람이 버글버글 했다. 건너편 5층 교회에는 아직 불이 밝았다. 하늘문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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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현 선생님과 진술분석을 마친 이후에도 나는 크로스 체크 차원에서 여러 전문가를 만났다. 모두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심리학과 교수 모두 세 자매의 진술이 성폭력 피해자의 것으로 믿기 힘들다는 분석 의견을 주었다. 20여 년간 성폭력 피해자 상담을 해온 선생님도 같은 의견이었다.


심지어 검증 과정에서 만난 한 산부인과 의사는 진술서를 읽어본 뒤 황당해했다. 유아기부터 성폭행이 있었다면 친모나 같이 거주한 할머니가 모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4~5세 여아가 성기 삽입을 당하면 살이 찢어지고 기관이 파열됩니다. 아이가 통증이 심해서 일단 심하게 울고 소리를 지를 거고요, 출혈도 심했을 거라 옷이나 이불 같은데 흥건하게 묻었을 겁니다. 이 정도 출혈이면 쇼크가 올 수도 있어요.”


세 자매의 진술처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는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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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듣고 다시 세 자매를 만났을 때 나는 달리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가 자신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끔찍한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 안에서 그 기억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자료를 요청했다.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첫째 유정씨가 아버지와 성관계를 하러 서울에 온 게 사실이라면, 호텔 예약 내역이나 빌렸다는 렌터카 내역이 있을 것이었다. 또한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했을 때 진료 기록도 구해달라고 했다.


처녀막 검사를 해보자는 제작진 내부 의견도 있었지만 기각시켰다. 처녀막(Hymen) 유무로 성관계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최근에 확립된 연구결과였고, 인권 침해의 소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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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세 자매는 아무것도 구해오지 못했다. 둘째 유리씨가 중학생 때 아버지와 동행해 낙태를 했다는 보건소에 당시 임신을 진단하는 초음파 장비가 없었고, 낙태 시술을 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분석, 자료들은 이제 하나의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들의 성폭력 진술은 거짓이라는 것, 자매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오기억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억의 인위적인 대체로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그저 다른 게 아니라 사랑했던 사람을 끔찍하게 증오할 정도로 돌변해 버린다면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불변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인간이란 그저 출처 불명의 기억을 담는 살과 뼈로 된 그릇인가. 정체성이란 그릇 속에 담긴 투명한 물 같은 걸까. 누군가 더러운 잉크를 뿌리면 순식간에 검게 변해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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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돌아와 있었다. 피해자였던 여자들이 어느 순간 무고한 가족에게 누명을 씌운 가해자가 되고, 다시 그들은 커다란 이단 교회의 발 밑에 깔린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순결한 종교적 의식이 행해져야 할 교회의 닫힌 문 너머에는 사제인척 하는 악인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구미영 권사, 강문석 장로, 박희 집사.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나는 다시 한번 5층 건물을 올려다봤다.



D-day


방송 당일. 모든 취재를 목표한 대로 마무리했다. 마감 작업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내용을 다듬었다. 여러 사람의 인생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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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청년 교인들 위에 신처럼 군림했던 교회의 리더들은 책임을 묻는 카메라 앞에 졸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희 집사는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줄행랑을 쳤고, 구미영 권사와 강문석 장로 부부는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쫓아냈다.


당신들을 믿고 따르던 청년들에게 거짓 기억을 주입하고,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 가족들을 최악의 범죄자와 피해자로 만들어놓고 죄책감이 없냐는 질문에 그들은 침묵으로 답했다. 문을 굳건하게 걸어 잠그고 들어가더니 경찰을 불렀다.


웬 괴한들이 문을 두드리며 겁을 준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나는 반 농담으로 말했다. 당신들이 잡아가야 할 사람들은 이 안에 있다고.


다만 내가 이들을 수사하는 입장에 선다 해도 죄목이 무엇이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사기라고 할 수도 없었고,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공공연하게 명예훼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교인들 당사자들의 기억으로, 딸이나 아들들의 입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법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신의 장난 같은 일이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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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은 대체로 믿고 말고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토양 같은 것이다. 기억은 곧 나 자신이고 기억한 것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방송을 앞두고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세 자매들이었다. 방송은 그들의 확고한 기억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나를 믿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토해낸 마음을 배반하는 일이기도 했다.


방송을 보고 그들이 깨어난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계속 오기억의 함정에 빠져있게 되면, 세상에 보낸 모든 구조신호가 허공으로 흩어진 듯한 좌절에 휩싸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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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송을 앞두고 첫째 유정씨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우리 프로그램의 결론이 당신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를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내가 그런 판단을 하게 된 과정을 최대한 소상하게 설명했다.


유정씨는 뜻밖에 담담하게 말했다. 피디님의 결론이 그러하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말씀을 들어보니 이 방송이 나가면 저희가 더 힘들어질 것 같긴 해요. 어머니도 걱정이고요... 그래도 방송을 보고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게요.”


각자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든, 어떤 기억을 갖고 있든, 이 취재 과정을 함께하면서 갖게 된 인간적인 신뢰가 작용한 것 같았다.


그리고 방송이 나갔다.





<기억의 미로 ⑩ 깨어남 (최종회)>에서 계속됩니다.








이 글은 제가 취재했던 실화입니다. 신원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 성별이나 나이대, 지역을 바꾸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사 자료와 판결문, 직접 취재한 경험과 사실에 기초하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픽션이 들어갔음을 밝힙니다. 총 10편에 걸쳐 이어집니다.
Q 파일 : 세상의 숨겨진 이면과 우리가 놓친 진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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