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나서 쓰다.
<손님>은 신천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다. 전체 군민의 1/4인 3만5천 명이 학살당한 신천대학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한 학살이라거나, 혹은 좌우 대립 과정에서 반공청년단에 의한 학살이라는 설, 우익과 좌익이 서로를 번갈아가며 죽였던 참극이라는 설 등이 있다. 황석영은 <손님>을 통해 신천대학살이 좌우의 극한적인 대립 과정에서 벌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누가 좌이고 누가 우인가를 가르는 이념. 그 이념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를 이 소설은 묻는다. 신천대학살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좌는 맑스주의고 우는 기독교였는데, 어느 것도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원래 안에 있지 않았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람들의 의식에 달라붙었을까?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했던 말이다.
나치즘이 맹위를 떨치던 당시, 유럽인들은 나치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 합리주의에 대한 높은 신뢰를 갖게 됐는데, 누가 보기에도 파괴적 파시즘 체제인 나치를 독일인들이 숭배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존의 봉건제 안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영주 지배 + 땅 중심의 사회 체제에 안착해 있었다. 하지만 시장 경제가 발달하고 토지로부터의 속박에서 사람들이 풀려나면서 사람들은 이 '자유'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혼란을 느낀다. 자아의 구심을 잃은 사람들의 그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필연적으로 어떤 권위주의적인 강력한 존재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바로 나치즘이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이 비교적 쉬웠을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유입 역시 마찬가지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가 시작되고, 봉건적 지배 체제가 무너지던 시기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남쪽 지역은 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정적인 봉건적 신분 제도가 꽤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북쪽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니 남쪽보다 더 빠르게 봉건제가 희석되었을 것이다. 당시 인민위원회가 북쪽에서 더 활발하게 조직됐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렇게 혼란에 놓인 사람들에게 미국/영국 등 외부의 강력한 국가에서 건너온 기독교라는 사상, 그리고 신이라는 절대 권위는 자아가 길을 잃지 않도록 잡아주는 단단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또 마찬가지의 대국인 소련과 중국에서 건너온 맑스주의 역시 신분제 시대의 억압된 분노까지 더해져 강력한 지지세를 얻었을 것이다. 이런 이념을 흡수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그 거대한 존재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타인의 모더니티
문제는,
그것들이 전부 타인의 모더니티였다는 데 있다.
어떤 사상이라는 것이 실제 사람들의 생활이나 물질 기반으로부터 자생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것이 상당히 편향적이거나 파괴적인 형태, 혹은 왜곡된 모습으로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을 역사는 여러 차례 보여준다. 주의가 삶에 뿌리박고 있지 않으니, 원래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할 인간의 삶이 주의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가깝게는 80~90년대 운동권들의 (자신들이 숭앙하는 이념에 반하는) 가부장적 행태라든가, 한국전쟁기 좌우대립 과정에서 만연했던 백색테러, 그리고 일본의 학생운동 부흥기에 좌경 분파 사이에서 나타난 극단적 폭력, 중국에서 문화혁명기 지식인에 대한 척살까지 예들은 충분히 많다. 이런 역사의 반복에서 영감을 얻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등의 소설에는 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신천대학살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은 이런 이념들을 손님이라고 보고, 소설의 제목으로 붙였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계급적 유산이 남도에 비해 희박했던 북선 지방은 이 두 가지 관념을 '개화'로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262p)
모두를 주인으로 만들겠다는 민주주의가 그 중심 이념이었을 2016년 한국의 촛불 항쟁에서, 어떤 참가자들은 기꺼이 여성 혐오적 발언과 노래를 즐겼다. 그 이후 바뀐 정권의 맹렬한 지지자들은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는 언론을 사냥하며 권력감을 즐긴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그것을 자생적으로 익히지 못했던 까닭에 그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인 타인의 모더니티 아니었을까.
외부의 어떤 주의를 흡수한 뒤에 그것을 자기 관철을 위한 무기로 휘두르며, 결국 목적이어야 할 사람 삶을 소외시키는 모습들은 여전히 안타깝다. 소설 속의 인물이 말하는 다음 한 마디가 주인 없는 주의들이 횡행하는 현실을 이렇게 비판한다.
그때 우리는 양쪽이 모두 어렸다고 생각한다. 더 자라서 사람 사는 일은 좀 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어야만 했다. 지상의 일은 역시 물질에 근거하여 땀 흘려 근로하고 그것을 베풀고 남과 나누어 누리는 일이며, 그것이 정의로워야 하늘에 떳떳한 신앙을 돌릴 수 있는 법이다. 야소교나 사회주의를 신학문이라고 받아 배운 지 한 세대도 못 되어 서로가 열심당만 되어 있었지 예전부터 살아오던 사람살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여기서 야소교 = 예수교 = 기독교를 뜻한다. 176p)
나온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작품이지만, 여전히 과거에 비춰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해석할 통찰을 주는 이 책은 언제든 읽어볼 만 한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