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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Mar 27. 2017

4. 부탄 사람들의 색다른 친절


부탄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 도착하니 출발이 두 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시간은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았고 부탄 공영항공사 드룩 에어Druk Air의 티켓팅 포스트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생전 처음 대면한 부탄 사람과 간단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표를 끊었고 느릿느릿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 


하지만 보안검색대 앞에는 각국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인의 여름 휴가지를 너무 만만하게 봤나. 여전한 몸살 기운과, 아침도 못 먹은 지친 몸으로 길게 줄을 기다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니 거의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복잡한 통로를 따라 출국 심사대로 가는데, 위쪽의 계단까지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는 것 아닌가.


비행기를 못 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부탄행 비행기는 아무나 아무 때나 잡아탈 수 있는 손쉬운 운송수단이 아니다. 내국인의 협조하에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탈 수가 있다. 하루에 방콕에서 부탄에 들어가는 비행기는 딱 한 편, 가까운 날짜의 비행기도 자리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여차하면 실례를 무릅쓰고 앞줄로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계 분침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줄은 더디 빠지고 초침은 물살을 가르듯 앞서나갔다. 30초면 끝날 출국 심사를 마치는 데 또다시 한 시간... 넓디넓은 수왈라품 공항에서 조그만 부탄 비행기를 타기 위해 한참을 뛰어 겨우 게이트에 도착했다. 마감 2분 전. 승무원이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앗 내 이름? 마지막으로 도착한 승객이 나였다. 



간신히 비행기에 올라탔다. 드룩 에어 항공기의 꼬리의 문양은 부탄의 국기다. 노란색은 왕실, 주황색은 불교, 부탄에서 드룩(Druk)이라고 불리는 용은 부탄 국민들을 뜻한다.



허약한 도시생활자


비행기에 올라타 앉으니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왔다. 다행히 자리가 넉넉한 편이어서 안락한 느낌이 들었다. 한숨을 돌리자 주변에서 각종 언어가 들려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부탄인 스튜어디스였다. 여성의 부탄 전통 의상인 키라kira를 푸른 빛으로 맞춰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들을 본 순간 내가 정말 부탄에 가는구나 싶었다. 방콕에서의 각종 사건이 기억에서 흐릿해지고 부탄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고도가 높아지자 이상하게 비행기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덩치가 큰 인도인들도 담요를 빌려 두르고 있었다. 수천 미터 산들을 넘어가야 해서 비행기가 더 높이 나는 걸까. 그래서 비행기 내부의 기온이 떨어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몸이 으실으실 추워지면서 그나마 나아졌던 몸살 기운이 다시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여행의 초반 며칠 동안 나는 온갖 여행자 질병을 다 앓았다. 처음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몸살감기, 그리고 그것이 나을 때쯤 찾아온 설사병... 비행기에서의 오한과 발열은 아마 노로바이러스로 인한 설사병(장염)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 그때부터 끼니마다 음식을 조금 먹어도 지독한 설사에 시달렸다.


더욱 큰 문제는 손발에서 시작돼 몸까지 퍼진 발진이었다. 부탄의 수도 팀푸에 도착한 날 밤, 뜨끈한 물로 샤워를 마쳤는데 갑자기 손발에 원인 모를 발진이 일었다. 발갛게 올라온 점들을 보고 있자니 몸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그후 손발과 몸이 너무나 간지러워 며칠 동안 매번 '참을 인'자를 성호처럼 그으며 돌아다녔다.


나중에 모든 질병에서 탈출한 후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생각해보니, 내 몸이 얼마나 허약한가 싶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서울이라는 위생적인 도시에서 나는 운동도 많이 하고 잔병치레도 안 하는 건장한 30대 남자였다. 하지만 그 작은 테두리를 벗어나 바깥 세계로 나가면 갖가지 적군의 침투에 우르르 무너지고 마는 게 내 면역체계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발전된 국가의 높은 위생 수준이 오히려 그 안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야생에라도 내던져진 듯 실내에서 각종 헬스기구와 스포츠를 체험하며 현대인들은 건강을 얻고 있다 믿겠지만, 사실 그건 도시 문명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지.



부탄 사람들의 첫 느낌


부탄의 파로 공항에 도착했다. 부탄에는 운영 중인 공항이 두 곳 있는데, 동쪽의 붐탕Bumthang이라는 지역에 하나 있고, 나머지 하나가 서쪽 끝의 도시 파로Paro에 있었다. 파로 국제공항. 외국인들은 대부분 이 공항을 통해 들어온다. 붐탕과 파로 사이의 직선거리는 120km 정도로 서울에서 춘천 가는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지만 가는 길은 간단치 않다. 부탄은 자연보호를 위해 웬만하면 터널을 뚫지 않아서 구불구불 험한 산세를 따라 돌아와야 하니 온종일 700~800km를 달려야 붐탕에서 파로 쪽으로 넘어올 수 있다. 도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이 얘기는 5편(다음편)에서 하겠다.  


파로에 내리자 걱정과는 달리 파아란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곧잘 오버하는 성격 탓에 강조 어구를 자주 쓰곤 하지만, 이곳은 한국에서 쓰던 말들로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의 원색이 눈 앞의 풍경을 물들이고 있었다. 


돌아다니는 내내 느꼈지만 가을을 앞둔 부탄의 하늘은 정말 파랗다.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님이 있는 곳에서 하늘을 보고 2km쯤 위를 상상하면, 부탄에서 내가 있었던 해발 고도가 나올 것이다. 평지처럼 보이는 파로 공항의 해발 고도가 2000m가 넘고, 보통 넘나드는 곳이 3000m 안팎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파란 하늘의 원인을 우주에서 찾기로 했다. 겹겹의 대기를 반쯤 걷고 올라가니 우주의 짙고 푸른 진공을 하늘로 보게 된 것 아니었을까. 



부탄 공항


부탄 공항의 입국 심사대


파로 공항에는 딱 내가 타고 온 비행기 한 대만 서 있었다. 한가운데 내려줘서 다른 관광객들과 같이 터덜터덜 걸어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부탄의 건물 안에 처음 들어와 본 셈인데, 겉과 안이 모두 전통 문양과 현대적인 깨끗함이 잘 조화된 느낌이었다.


부탄은 현지인의 초대로 입국하지 않는 이상 관광 목적의 입국은 무조건 현지 에이전트를 통해야 한다. 그에게 미리 여행세가 포함된 총 여행비용(하루 200~250달러 정도)을 송금하고 그와 미리 협의해 짠 여행 일정대로 현지인 가이드, 드라이버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랬던 까닭에 공항 밖에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서 있었다. 늑장을 부리다 나온 나도, 입구 왼편에 Jaewon Jeong이라고 쓴 흰 종이를 든 심드렁한 표정의 두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지겹게 같이 다닐, 춘쭈르 똡뗀이었다. 



능숙한 드라이버 똡뗀(왼쪽)과 한국어 포함 4개국어를 구사하는 탁월한 가이드 춘쭈르(오른쪽)



춘쭈르는 나와 모든 여행지를 같이 다닐 가이드였고, 똡뗀은 그곳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태워줄 운전사였다. 우리는 30대 초중반으로 나이도 다 비슷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비행기의 스튜어디스 여성들과 공항에서 마주친 몇몇 사람들, 그리고 첫날 방문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춘쭈르, 똡뗀까지. 부탄인들은 대체로 온화하고 친절했다. 뜻밖에도 그 온화함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에서 낯선 사람의 친절이란 대개 모종의 금전적 목적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에서 단련된 나는 누군가 친절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속으로는 그것이 어떤 이해관계와 맞닿아 있으리라는 계산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하지만 그 친절함의 결이 내가 한국에서 겪어온 것과는 어딘가 좀 달랐다. 상대를 배려하고 필요한 것을 해주되, 감정적으로 애써 꾸며 화기애애함을 만드는 인위적인 태도가 없었다. 나는 일종의 소비자였지만 그들은 내게 감정노동을 하지 않았다. 대체로 억지스레 감정을 꾸민 친절만을 겪어온 나로서는 '감정노동이 없는 친절’이라는 태도가 낯설었다. 


서비스 종업원의 굽신거림에 가까운 친절을 통해 사람들은 '갑 체험'을 한다. 일상에서야 대부분 을로 살아가고 있으니 황홀하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 크게 필요한 게 없어도 휴식하듯 찾아가 지갑을 연다. 잘 짜인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제활동이 불필요한 소비까지 촉발해서 매출을 높여야하는 괴이한 궤도 위에 올려져 있지 않다면, 누군가 애써 어깨를 움츠리고 감정노동을 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부탄은 그런 나라였다.



부탄에서 처음 먹었던 식사. 우리처럼 쌀이 주식인데, 밥을 많이 먹고 반찬은 한두 종류만 두고 적게 먹는다. 이건 외국인용 식사라고 나름 여러 종류를 만들어준 것.


팀푸의 민속박물관에 갔다가 부탄 전통주인 아라(Ara)를 처음 맛봤다. 중국집 가서 먹는 술 빼갈과 비슷하게 톡 쏘는 맛인데 끝맛이 독특하다.


누구게?



팀푸의 밤


한 시간여를 달려 부탄의 수도 팀푸Thimphu에 도착했다. 원래 부탄의 수도는 북동쪽으로 3시간여 거리에 있는 푸나카Punakha였는데 1960년대 이후 국왕이 좀 더 교통이 편한 팀푸로 수도를 옮겼다. 하지만 겨울에 따뜻한 푸나카는 여전히 부탄의 겨울 수도다. 국왕 일가는 겨울이 되면 푸나카의 성으로 돌아간다.


팀푸의 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조금씩 저물 때였다. 춘쭈르는 호텔 데스크를 지키던 점원과 안면이 있는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얀 종이에 자신의 영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서 내게 건넸다. 이따가 거리 구경하다가 혹시 길을 잃으면 바로 달려올테니 연락하라며. 그러고는 30분여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부탄에서 처음 나 혼자 갖게 된 자유시간이었다. 짐을 풀고 주저할 것 없이 밖으로 나갔다. 팀푸의 거리는 활기찼지만 부산스럽지 않았다. 카트만두나 방콕의 거리가 부연 매연과 점액질처럼 밀려드는 인파로 정신을 쏙 빨아들인다면, 이곳은 야트막하고 잘 정돈된 건물들과 적은 숫자의 차들 덕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을 수 있었다. 춘쭈르는 약간의 자부심이 담긴 말투로 “팀푸는 전 세계 수도 중에서 유일하게 차가 안 막히는 곳”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외국 호텔에 가면 슬리퍼가 없어서 불편할 때가 있다. 이날도 마찬가지여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슬리퍼를 팔 만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부탄의 자랑인 수공예품점들이 길게 늘어선 이색적인 거리도 보았고, 학교와 경찰서처럼 주요 시설들도 구경했지만 정작 오늘 밤에 필요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걸어 내려오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어서 말을 걸었다. 슬리퍼 파는 가게가 있나요?


호텔에서 신을 신발 찾나봐요? 흔한 부탄 사람 얼굴에 인도인 느낌이 섞인 듯한 외모의 땅딸막한 아주머니가 쾌활하게 되묻는다. 척 보기에도 내가 관광객 같아 보였나보다. 그렇다고 말했더니 자기가 직접 데려다주겠다며 손짓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신발 가게가 집에 가는 길에 있는데 5분밖에 안 걸린다면서, 이 근처에서 제일 저렴하고 질 좋은 신발들을 판다고 했다.


아주머니의 이름은 페마. 알고 보니 페마는 내가 방금 지나쳐온 호화스러운 대형 호텔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광객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잘 알아차리는 모양이었다.


한국 사람이죠? 페마와 걸어가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대번에 나의 출신 국가를 알아맞혔다. 아니 내가 그렇게 전형적인 한국 사람처럼 생겼단 말인가! 홍콩 모 배우부터 어느 이름모를 중국인, 혹은 어느 국가대표 골키퍼까지 그간 내가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전혀 자기들끼리는 닮지 않은) 그들은 아시아 곳곳에 분포해 있는데… 페마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저녁 7시, 팀푸의 거리


페마가 알려주고 간 신발 가게



부탄 사람들은 호텔에서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부터 깡 시골의 기념품점 점원까지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한다. 자기들의 고유어인 종카어와 함께 다들 기본 2개국어는 하는 셈이니, 툭하면 글로벌 운운하는 어느 나라보다는 더 세계화된 나라인 셈이다. 부탄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덕에 나의 어눌한 영어도 기꺼이 알아 들어주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만난 부탄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었는데, 페마는 한 마디를 물으면 친절하게 열 마디쯤 설명을 해주는 캐릭터라 더 얘기 나누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행복한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었는지 궁금증을 한가득 안고 부탄에 왔으므로 물어볼 것이 많았다. 하지만 기질이 워낙 남 좋은 것만 보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페마한테는 대뜸 부탄의 범죄율부터 물었다. 


“페마, 부탄은 범죄율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낮다고 들었는데 진짜예요?”

“음… 낮긴 하죠. 하지만 누가 그 카메라 빌려달라고 하면 조심해야 해요.”


페마가 대뜸 내가 들고 있던 고가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낮에는 평화롭지만 밤에는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요즘 들어 팀푸에는 약물이나 술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젊은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뭐 그렇다고 해도 다른 나라보다는 낫겠지만요.”


이때 생겼던 여러 궁금증은 이후 부탄 사회를 조금씩 관찰하면서 하나 둘 풀려가게 된다. 두둑한 지갑을 들고 부탄에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금전의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로 살아가는 부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부탄의 젊은이들 모두가 빠짐없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이 보여주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외부 세계는 그들의 열망과 결핍을 어떻게 바꿔가고 있을까.


페마는 신발 가게 앞까지 나를 데려다준 뒤 경쾌하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꽤 괜찮아 보이는 슬리퍼 한 켤레의 가격이 150눌트럼. 한국 돈으로 2,500원 정도였다. 나는 기분좋게 신발을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내일이면 팀푸를 떠나 본격적인 부탄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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