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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Mar 27. 2017

5. 부탄 여행의 소소한 방해꾼들


오늘은 팀푸를 떠나 본격적으로 부탄 동쪽 지방을 향해 가는 날이다. 오늘 다섯 번째 여행기는 가는 길에 만나게 된 부탄 여행의 방해꾼들을 소개하려 한다.


동쪽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래서 보통 4~5일 정도 일정으로 부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동쪽의 도시들까지는 돌아보지 못한다. 나는 한 달의 휴가가 있으니 많은 사람이 도달하지 못하는 지역까지 가볼 수 있게 됐다. 먼저 팀푸에서 출발해 부탄의 겨울 수도 푸나카Punakha를 거쳐 동쪽 지역으로 가기로 했다.


푸나카에 가려면 도출라 패스dochula pass를 거쳐 가야 한다. 도출라 패스는 구불구불한 산허리를 따라 이어진 고지대의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해발 3,150m 지점에 도출라 촐튼dochula chorten이 있다.



(*촐튼은 스투파stupa라고도 부르는데,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석상이다. 부탄에는 다양한 크기의 스투파들이 전 지역에 걸쳐 있다. )



도출라 촐튼(dochula chorten)의 모습


석상의 사면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다.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 산맥의 산 허리



도출라 촐튼에 오르니 안개와 구름이 자욱했다. 겹겹의 구름 틈으로 간혹 파란 하늘이 비쳐 보였다. 8월 우기에 부탄에 온 이상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멀리 히말라야 산맥의 눈 덮인 스카이라인을 놓친 것은 아쉬웠다. 


도출라 촐튼에 놓인 크고 작은 108개 석상에는 사연이 있다. 부탄이 비교적 최근에 벌인 전쟁과 관련된 얘기다. 부탄의 남쪽 국경과 접한 인도 아쌈 지역에는 1990년대에 아쌈을 독립시키려는 분리독립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탄 서남쪽의 밀림에 잠입해 들어와 비밀리에 군사 캠프를 만들었다. 1996년 부탄 정부는 이 사실을 알게 됐고, 인도 측은 자신들과의 공동 군사작전을 벌여 그들을 섬멸할 것을 부탄에 요구했다. 


하지만 부탄 국왕은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인도 정부의 요구를 거부한 뒤 반군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년간의 노력에도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2003년 반군들과의 협상이 최종 결렬됐고, 그렇게 아쌈 독립주의자들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왕이 직접 가서 지휘한 전투는 이듬해 초까지 이어졌고 결국 반군의 캠프는 섬멸됐다. 이후 팀푸로 복귀한 왕은 당시 죽은 부탄 군인들을 기리는 의미로 108개의 석상을 만들었다. 그 석상들이 모인 곳이 도출라 촐튼이다. 



도출라 촐튼의 108 석상


도출라 촐튼은 신성한 곳이어서 부탄 주민들이 둘레를 돌며 기도를 한다.



팀푸에서 촐튼까지는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남은 시간 먼 길을 가야 했다. 오늘 남은 거리는 대략 700여km 정도. 촐튼 옆 카페에서 차를 한잔 하고 다시 차에 오르자 춘쭈르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말했다. 앞으로 정말 울퉁불퉁한 길을 9시간가량 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차를 타고 가는 길이 워낙 멀다 보니 우리는 차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춘쭈르는 종종 아재 개그를 하곤 했다.


춘쭈르 : 재원, 방콕에서 뭐 했어?

나 : 이것저것 했지만 타이마사지가 정말 좋았어. 춘쭈르는 방콕 가본 적 있다면서? 타이마사지 받아봤어?

춘쭈르 : 아니, 하지만 난 부탄마사지를 자주 받아. 오늘 재원도 부탄마사지 받게 될 거야.


내가 눈이 희둥그레져서 물었다. 


나 : 아니, 부탄에도 마사지가 있어? 처음 듣는데?

춘쭈르 : 있지. 범핑(bumping) 마사지!


춘쭈르가 앞자리에 앉아 주먹을 쥐고 엉덩이를 통통 튀기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부탄의 도로가 대부분 비포장이어서 차가 심하게 흔들리기 때문에 몸이 범핑(부딪힘)되는 것을 두고 마사지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고속도로로 위장한 시골길


팀푸를 벗어나 조금만 장거리 이동을 하다 보면 부탄 여행의 첫 번째 방해꾼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고속’도로다. 이름은 꼬박꼬박 highway라고 붙여놨는데 막상 달려보면 포장도 안 돼있고 차선 표시도 없는 시골길이다. 평범한 시골길이면 차라리 좋겠는데 해발 수천 미터 위 산맥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어지러운 도로들이다. 그나마 곳곳에서 확장이나 포장을 한다고 공사 중이어서, 대형 트럭이 틈만 나면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비가 거의 매일 왔기 때문에 이런 도로를 가다 보면 온갖 황당한 일을 겪게 되는데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팀푸와 트롱사 사이쯤 되는 곳이었는데, 밑으로 떨어지면 온종일 구르겠다 싶은 높은 산이 허리께에 어설픈 액세서리처럼 길을 걸치고 있는 장소였다. 전날은 비가 좀 많이 와서 도로 곳곳이 질퍽거렸다. 가는 길에 보니 도로 옆의 바위가 좀 무너져 있었는데, 그로 인해 흙길이 푹 파여 있었다. 부탄의 고속도로에는 바깥쪽에 철제 가드레일조차 전혀 없으므로 혹시 모르고 이런 무너진 길을 지났다가는 부탄 저승사자를 만날 수도 있겠다.



부탄의_흔한_도로_풍경.JPG



다행히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지역 정부에서 사태 파악을 했는지 포클레인 한 대가 출동해 긴급 복구공사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바삐 움직이는 포클레인이 보이고, 뒤로 차들이 줄줄이 이어 섰다. 도시 간 고속도로에 차들이 많이 오가지 않지만 30여 분을 그러고 있자니 약 50대의 차들이 늘어섰다. 


얼마 후 공사가 끝났는지 포클레인이 후다닥 도로 귀퉁이의 여유 공간 쪽으로 숨었다. 하지만 위에서는 계속 물과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도로가 흙이니 같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들었지만, 이런 일을 자주 겪어봤을 춘쭈르와 똡뗀이 전국노래자랑 보는 중학생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믿어보기로 했다. 


지역 정부의 관리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이 빨간 깃발을 들고 공사를 마친 곳으로 갔다. 거기 서서 돌이 좀 적게 떨어진다 싶으면 깃발을 휙 휘둘렀다. 그러면 한 대가 이때다! 하고 액셀을 밟아 휑하니 지나가고, 또 깃발을 휘두르면 다음 차가 지나갔다. 가끔 차들이 서두르다가 흙탕물을 밟으면 더러운 물더미가 그를 덮쳤다. 하지만 길 가장자리에 서 있던 그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면 황천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으므로 그는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안쓰럽게 보고 있자니 어느덧 우리 차례가 왔다. 깃발을 주시하는데 괜히 심장이 콩닥거렸다. 방금까지 차들이 지나가면서 물렁물렁해진 흙길이 하필 우리 타이밍에 우지끈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은가...! 춘쭈르와 똡뗀은 아까 기다릴 때 어디 산길에 올라가더니 따온 잡초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나만 긴장한 모양… 어쨌거나 깃발 아저씨가 오른쪽 손에 든 붉은 깃발을 힘차게 흔드는 순간, 똡뗀은 거세게 액셀을 밟았고 차는 아저씨한테 흙탕물을 듬뿍 튀기며 무너진 길을 순식간에 지나쳤다. 이 정도는 겪어봐야 부탄과 친해질 수 있나보다


도로의 상태만큼이나 우리의 여행을 방해했던 것은 도로의 길이였다. 서쪽의 팀푸에서 동쪽의 목적지 붐탕까지 구글 지도에서 직선거리가 120km 정도 나오길래 이런 길을 뭘 9시간이나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부탄 사람들은 그렇게 도로가 전부 산속으로 이어져 있는데도 단 하나의 터널도 뚫어놓지 않았다. 심지어 다리도 거의 없었다. 다리를 건너면 이쪽 산등성이에서 저쪽 산등성이까지 10분이면 갈 길을 1시간 가까이 돌아가기도 했다. 아마 터널이 있었다면 액셀을 깊숙이 밟아가며 산중 질주를 할 수도 있었으리라. 



무너진 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선 포크레인이 길을 뚫는 공사를 하고 있다.


건너편에서 그 장면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사람들


돌이 떨어지니 조심하라는 경고판



웬 개나 소가 이렇게 많아


그렇게 울퉁불퉁한 도로를 지나다가 기적같이 포장도로를 만날 때가 있다. 도시가 가까워지면 나타나기도 하고, 주 경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신나게 액셀을 밟으며 도로 위의 자유를 만끽했다. 시원한 산바람과 쾌적한 승차감. 아 이런 게 드라이빙의 맛이지! 하지만.


그럴 때면 번번이 나타나는 방해꾼들이 있었다. 부탄의 길 위에는 정말 개나 소가 많다. 정말 사람 돌아다니는 것만큼이나 개나 소가 돌아다닌다. 모처럼 속력을 높이고 일찍 도착해서 쉴 꿈에 부풀어 있다가도 갑작스레 출몰하는 개나 소 때문에 한참을 멈췄다 가야만 했다. 


개는 빠르기나 하지 길에서 소 떼를 마주치면 속이 터진다. 차로 슬며시 다가가 귀에다 대고 경적을 빵빵 울려줘야 슬금슬금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는 0.1배속 영상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바깥쪽으로 걸어나간다. 심지어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곳에 목초지나 평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서 올라온 소 떼나 멍멍이들이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미스터리한 나라다. 그런데 춘쭈르가 말하길, 다 주인이 있는 애들이란다.



첩첩 산중, 주 경계 초소 옆에 개 네 마리가 뛰놀고 있음


이 사진에 보이는 개와 소의 총 마릿수는? 사진을 확대해서 보세요~


툭하면 소들의 방해를 받는다.


뭔데?


춘쭈르, 똡뗀과 소풍을 갔는데 근처에서 뛰놀던 멍멍이가..


... 친구 소를 한 마리 데려와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렇게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길을 가는 것이 고단하게만 느껴졌다. 여행의 하루가 꼬박 이동하는 데만 들어가는 것도 아까웠다. 하지만 몇 번을 그렇게 먼 거리를 다니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런 불편을 참고 있는 거지?


돈이 없어서? 그건 아닌 것 같다. 절대적인 국내 총생산액이 높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옹색하지 않게 살아간다. 왕듀라는 지역을 지나갈 때 평범한 촌로인 춘쭈르 부모님 댁을 멀리서 보며 지나치게 됐는데, 앞에 넓은 밭을 끼고 있는 3층짜리 전통 가옥이었다. 


부탄의 다른 시골마을에 가봐도 우리나라의 쪽방촌 같은 슬럼 지역은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이 나라는 전면적인 무상의료와 거의 완전한 무상교육을 하는 나라다. 그것뿐인가. 춘쭈르에 따르면 부탄 정부는 새로 결혼하는 부부에게 3에이커(acre, 1에이커는 약 1224평)의 땅을 무상으로 준다. 나라에서 주는 결혼축의금이랄까. 부부는 그걸 다시 팔아도 되고 가지고 있다가 집을 지어도 된다.


아니 그럼 혹시 부탄이 나라에서 모든 걸 주는 공산주의 나라인가요? 라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 공장이나 농장 같은 생산수단은 국가에 귀속되어 있지 않고 모두 개인의 소유다. 우리나라처럼 국가 기간산업(부탄은 수력발전)에 한해서만 국영이고 관광업 같은 주요 산업은 모두 민간에서 책임지고 있다. 그러니 공산주의는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며 자본주의에 가깝다.



부탄의 고속도로 휴게소(?). 폐가 같지만 손에 든 이런 공산품들도 버젓이 팔고 있다.



행복해지기 위한 영감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러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팀푸로 돌아오는 길, 문득 불편하기만 했던 갈 때와는 조금 다른 감상이 들었다. 아마 이 나라를 떠날 때가 되어 더 긍정적인 감상에 젖었을지 모르겠지만. 문득 이 도로들에도 부탄 사람들의 철학이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경제가 성장한다. 그럼 부탄에는 토목공사를 벌일 자본이 없었을까? 아니다. 개발 자금을 차관해주고 그 대가로 저개발 국가의 시장을 잠식하려는 외국 자본은 얼마든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왜 이런 불편한 도로를 여태껏 내버려 두고 있었을까. 게다가 터널도 뚫지 않고 다리도 놓지 않고, 빙빙 돌아가면서 말이다.


부탄과 1인당 국민총생산GNP액이 비슷했던 1960~70년대 한국은 약간의 자본이 모이거나, 미국이 돈을 꿔주거나, 혹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적당히 덮고 가겠다고 약속한 대가로 일본에서 돈을 받으면, 도로를 깔거나 발전소 등을 짓는 데 썼고 상당 부분은 재벌들한테 퍼줬다. 국민 대부분이 최소한의 생활임금도 받지 못할 때였고 일터에서 인권은 최악의 수준이었지만, 국가는 밑바닥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같은 경제규모였던 시점에서 부탄의 선택은 달랐다. 그들은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들의 손에 쥔 자본을 소수의 기업에 특혜로 주거나 당장의 삶과 무관한 토목 공사에 쓰지 않았다. 영국에서 현대교육을 받고 온 국왕은 1970년대부터 교육 과정을 개편하면서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다. 특히 영어 교육에 공을 들였고 이제 부탄 사람들은 쉰 살이 넘은 청소부 아주머니조차도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런 질 높은 교육은 대학까지 전부 무료다. 게다가 국민의 모든 의료비용을 국가가 책임지므로 나 같은 외국인에게조차 모든 의료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양육 도움이 필요한 20가구 이상이 사는 마을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지어지며, 결혼하면 애 낳고 알콩달콩 살기에 충분한 자원이 현물 형태로 제공되기도 한다. 



부탄_흔한_시골집1.jpg


부탄_흔한_시골집2.jpg



흔히 우리는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삶이 곧 무너지거나 상당한 불행을 겪게 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항상 성장하는 경제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아무리 노동을 해도 자아를 실현할 수 없고 공허감만 더해가니, 퇴근 후에 낭비하고 탕진하며 멈춰가는 삶의 심장에 미미한 전류를 흘려 넣는다. 하지만 퇴근조차 쉽지 않으니, 이제 직장은 생을 실현하는 장소가 아니라 생을 이어가기 위해 버텨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의 결핍감과 병적인 경제구조를 목발 삼아 비틀비틀 생산이 늘어 경제성장률에 플러스가 찍히는 것이다.


수백 km를 달리는 동안 차를 흔드는 부탄의 거친 도로는 경제성장이 국민의 행복과 별 상관이 없다고 믿어온 부탄인들의 고집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일찌감치 사회를 평가하는 척도로 국민총생산GNP을 거부하고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을 개발했다. 부탄의 GNH는, 평등한 사회 발전, 문화 보존, 환경 보전, 건강한 협치 체계의 발전 등 네 가지 기준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항목들을 놓고 부탄인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태어나 행복하게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공들여 연구하는 것이다. 부탄에 가 있으면 우리가 갇혀 있는 생각의 감옥이 선연히 보이기 시작한다. 경제의 무조건적인 성장보다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우선 아니냐고 그들은 묻는다. 


부탄의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인도, 한국 등에 유학까지 다녀온 뒤 부탄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인 정부 공무원으로 일하다 재미없다며 때려치우고 나온, 부탄 엘리트인 나의 가이드 춘쭈르한테 물어봤다. 그래서 당신들은 모두 행복하냐고. 춘쭈르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행복해지려고 하는 나라야. GNH는 통계적인 측정치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고민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영감’이야.


춘쭈르는 inspiration(영감)이라는 단어를 써서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한 창조적이고 영적인 느낌. 한 나라의 사람들이 그런 영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눈먼 경제성장만 외치는 나라의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다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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