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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Mar 28. 2017

6. 부탄의 힐링 요리를 소개합니다


지난 여행기에 잠시 적었듯이 여행 시작 후 나는 세 가지 병증에 시달렸다. 하나는 한국에서부터 증상이 있었던 몸살, 방콕 떠나기 직전에 생긴 설사병, 그리고 부탄 들어온 첫날 갑자기 몸 곳곳에 올라온 발진까지 각국에서 얻어온 병들을 다 앓는 중이었다.


일 년에 몸살 한 번 없이 산 적도 많았는데 하필 참 재수가 없구나, 하며 돌아다녔는데 다행히 몸살은 금방 나아졌다. 설사병은 크게 신경 쓰이는 문제이긴 했지만 기력과 기분을 축내지는 않았으므로 버틸 만했다. 다만 혹시 모를 참사에 대비해 항상 휴지를 넉넉히 들고 다녔고, 사원에 가든 시내를 돌아다니든 일단 뒷간의 위치를 섬세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게 좀 귀찮았을 뿐.


다만 정말 요모조모로 성가셨던 것은 바로 간지러움! 이었다. 발등과 손등, 그리고 옷이 닿는 허리나 등 부위에 올라온 발진 부위가 종종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세계 최대의 불상 앞에 갔는데 발등이 간지러워서 도무지 경건한 마음이 들지 않았고, 자려고 누워서도 이국의 밤에 느낄 만한 낭만은커녕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더는 참을 수 없다! 나는 춘쭈르한테 SOS를 쳤다.



불쌍한 외국인을 위한 긴급진료


나는 좀 대책 없이 낙관적인 성격인 데다 여행 가서 아파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변변찮은 약도 챙겨 오지 않았다. 심지어 여행자보험도 들어놓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험 없으면 이빨 뽑는데 수백만원한다는 미국 같은 나라에 갔으면 그지되기 딱 좋은 성격. 하지만 내가 있는 이 곳은 어디인가. 전 국민과 심지어 외국인에게도 병원비와 약값이 공짜라는 부탄 아닌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나같은 병자한테는 비비적대기 딱 좋은 곳이었다.


푸나카에 들렀다가 아침에 출발하는 길. 우리는 병원 진료를 위해 춘쭈르의 고향이기도 한 왕듀Wangdue에 들렀다. 왕듀는 팀푸와는 또 다르게 활기차고 잘 정돈된 느낌의 도시였다. 계획도시처럼 건물들이 가지런하게 들어서 있고, 부탄 특유의 아치형 창문을 낸 색색의 벽들이 멋스러웠다. 도시가 크지는 않아서 우리는 왕듀의 1차 의료 기관인 보건소에 금방 도착했다.


부탄의 의료체계는 1차로 동네와 읍면 단위의 보건소, 2차로 20개 주에 하나씩 있는 지역병원, 3차로 전국에 3개가 있는 종합병원으로 구성돼 있다. 일단 1차 기관에서 진료를 받고 좀 더 고급 진료가 필요한 경우 2, 3차 기관으로 간다. 내가 갔던 왕듀의 보건소는 허름한 외관이었지만, 팀푸에서 본 종합병원은 우리나라 도시 병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나라 전체에 의사수가 200여명 밖에 안돼서 병원에 가면 오래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왕듀의 병원 접수대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춘쭈르가 접수를 위해 이곳저곳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더니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사람이 많아서 내가 가야 할 과(科)에는 대기 줄이 너무 길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갈 길이 멀었으니 거기서 한두 시간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춘쭈르는 다른 방법을 알아보겠다며 병원 입구쯤에 서서 바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고향 왕듀의 인맥을 총동원해 다른 병원에 진료를 빨리 받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 춘쭈르가 양손을 번쩍 들고 방법을 찾았다면서 다가왔다. 환희에 찬 그를 따라 우리는 십분 정도 차를 타고 다른 병원으로 갔다. 왕듀에 있는 군병원이었다. 춘쭈르의 형이 왕듀에 상주하는 군인이어서 형 소개로 군병원에 온 것이다.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부탄의 병영에 들어오게 됐다. 내가 보기에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처럼 병영이 삼엄한 느낌은 아니었다. 허가받지 않은 나같은 민간인 겸 외국인 겸 병자가 차에 실려 들어오는데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차를 세워놓고 병영을 가로질러 병원 건물로 가는데도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춘쭈르는 좀 긴장한 모양이었다. 접수대로 가기 전에 헛기침을 두어 번 했고 접수대에서 사무적인 태도로 필요한 말만 딱딱 던지는 군인 앞에서는 살짝 말을 더듬기도 했다. 능글맞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 해도 서러워할 춘쭈르인데 의외였다. 한때 군인이었고 지금도 거대한 병영 같은 나라에서 사는 나와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아온 그의 차이일까.


접수가 끝나고 잠깐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춘쭈르가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내 앞에 먼저 기다리던 서너 사람보다 내 이름이 먼저 불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배려라고 했다. 앞에 기다리던 할머니와 아이들한테는 좀 미안했지만 어쨌든 나의 간지러움을 빨리 호소할 수 있게 되어 들뜬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들어가니 어깨가 딱 벌어진 여성 의료장교가 갈색 제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까무잡잡한 얼굴. 의사는 내가 들어가자 마른 입꼬리를 들며 슬쩍 웃어 보였다. 하지만 순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얘는 뭐지? 하며 스쳐간 순간의 당황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씩씩하게 인사했다. 너무 간지러웠으니까... 나 좀 구해주세요 하는 심정으로.



처방전



병원에 가면 종종 배신감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행여 특이한 불치병에 걸렸을까 자기연민을 안고 가는데, 의사는 당신 같은 사람 하루에 백 명쯤 본다는 듯 손쉽게 진단하고 처방하니까 말이다. 부탄 의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각종 영어를 동원해 간지러움과 불면과 집중력 저하 증상을 설명했으나 그는 질문을 세 개쯤 하더니 처방전을 휘리릭 써줬다.


아마 이런 발진 알레르기 증상은 원인의 해소가 어려우니, 자연치유가 될 때까지 간지럼 완화약만 처방하는 모양이었다. 그 약에 간지러움을 없애는 성분인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항히스타민제는 1세대부터 최근에 나온 3세대까지 개선을 거듭했는데, 1세대 약은 먹는 사람을 졸리게 하는 등 여러 부작용을 안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졸린가 싶어 성분표를 보니 내가 먹은 약이 하필 1세대였던 것… 그 덕에 나는 돌아다니는 차에서 창문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계속 졸았다. 똡뗀과 춘쭈르가 보기에 처음 며칠간 나는 병든 부랑자 같았을 것이다. 몸을 자꾸 긁으면서 계속 졸았으니까.



부탄의 음식들


몸이 자꾸 이상하니 먹는 걸 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누군가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러니까 신선한 재료들이 인위적인 맛의 첨가 없이 솜씨 좋게 조리된 음식들을 먹어야겠다고 누군가 마음먹었다면, 부탄은 천국 같은 나라다. 일단은 말로 하는 것보다 몇 장의 사진으로 부탄 음식을 소개하는 게 좋겠다. 한 끼에 우리 돈으로 4만 원쯤 하는, 그러니까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한 12만 원쯤 했다고 볼 수 있는 호텔 밥에서부터, 시골 관광지 식당의 소담한 식사까지 나는 웬만한 부탄 밥상을 다 받아봤다. 그중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음식들을 몇 개 소개하겠다.



㉠ 케와 다찌 Kewa Datshi


부탄 사람들은 음식에 치즈를 많이 쓴다. 시골 장터에 가면 치즈 만들어 파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어느 사원에 갔을 때는 거기 주지승쯤 되어 보이는 분이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한테 팔뚝만 한 치즈를 떼줘서 한참 우물우물 먹기도 했다.


감자와 고추도 음식에 폭넓게 쓰인다. 둘 다 품종에 따라 고산지대에서도 잘 자라는 식용 작물이니 부탄 사람들이 고추와 감자를 즐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중에서도 치즈, 감자, 고추 세 가지를 모두 활용한 음식이 있었는데, 바로 케와 다찌Kewa Datshi다. '케와'는 부탄의 고유어인 종카어로 감자를 뜻하고, '다찌'는 치즈를 뜻한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Cheesed Potato 정도가 될 것 같다.


부탄 사람들의 식습관은 우리나라나 서양 사람들과 좀 다르다. 부탄인들은 밥을 많이 먹는다. 레드라이스라는 살짝 붉은빛이 도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데 정말 우리 밥공기의 세 배쯤 되는 밥을 퍼 놓고 반찬은 한두 가지만 놓고 밥을 먹는다. 그 한두 가지 중에 거의 빠지지 않는 음식이 케와 다시다.


현지인들은 에마 다찌Ema Datshi라는 음식도 흔하게 먹는다. '에마'가 고추라는 뜻이고 '다찌'는 치즈라는 뜻이니, 케와 다시에서 감자를 빼고 치즈에 고추를 조려 먹는 음식이다. 다만 케와 다시보다 에마 다시는 훨씬 맵다. 부탄인들이 매운 고추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의 식사에 에마 다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케와 다찌 feat. 완두콩


전형적인 케와 다찌


아시아에서 많이 쓰는 고수를 살짝 넣은 케와 다찌. 고수에도 종류가 많은데 태국 가서 먹는 것처럼 비누맛(?)이 나지는 않았다.


이건 감자를 살짝 튀겨서 달콤한 간장맛의 소스에 살짝 볶은 요리다. 트롱사의 워치타워에 갔다가 거기 붙어 있는 전혀 기대 안 했던 식당에서 먹었는데, 정말이지 맛있었다.


외국인을 위한 일반적인 상차림. 산더미처럼 밥을 주고 찬을 4~5개 정도 내준다. 이렇게 차려준 식당의 모습이...


이랬다. 잘 보면 창문에 트립 어드바이저(Trip Advisor) 별 다섯개라고 붙여놨음. 식당은 대부분 깔끔하고 분위기 있다.




㉡ 부탄 김치


한국만 벗어나면 이렇게 고추를 많이 음식에 쓰는 민족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부탄 사람들은 고추를 가루로 만들어 음식에 넣기도 하고, 매운 고추를 잘게 잘라 버무린 뒤 김치처럼 먹기도 한다. 특히 약간의 채소와 빨간 고추를 넣어 매 끼니에 먹는 음식이 있었는데, 치즈가 들어간 음식의 느끼함을 덜어내는 데 아주 좋았다. 다만 김치보다 훨씬 매워서 많이는 못 먹는다.



부탄 사람들이 김치처럼 먹는 고추 요리. 식당마다 조금씩 비주얼과 재료가 다르다.




㉢ 다양한 채소 요리


다양한 채소 요리야말로 부탄 음식의 백미라 할 만하다. 설익은 작은 콩과 당근, 양배추, 브로콜리 같은 재료들을 잘게 썰어 간장 맛이나 매콤한 맛이 나는 소스에 볶은 채소 요리들은 매 끼니 나오는데 밥도둑이었다. 이런 음식들을 먹어보면 재료가 참 생생하다는 느낌이 든다. 식재료를 지역에서 키우고 소비하는 로컬 푸드 체계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부탄에서는 이런 신선한 음식을 언제든 맛볼 수 있었다. 매끼마다 채소뿐 아니라 밀가루 음식과 기름에 튀긴 음식, 고기류 등을 배불리 먹었지만 오히려 끼니를 거듭할수록 살도 빠지고 고질적인 소화불량도 사라졌다.



팀푸의 레스토랑에서 먹은 채소 요리. 현지인들도 많은 식당이었다.


푸나카 인근의 식당에서 먹은 야채 요리



㉣ 다양한 면 요리


면 요리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2009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보면 부탄 지역 면 요리의 유래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제작진은 중국에서 가져온 압출식 면틀과 거의 유사한 면틀을 붐탕 지역 사람들이 메밀국수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구체적인 설계는 조금 달랐지만, 면을 만들어온 여성들에게 중국에서 온 면틀을 사용해보라고 줬더니 금세 면을 뽑아냈다. 부탄의 전통 압출식 면틀은 열을 사용하지 않아서 면이 길게 뽑혀 나오지 않고 중간에 짧게 끊어진다고 한다. 제작진이 만난 학자들은 이 면틀이 중국을 오가던 티베트 승려들에 의해 부탄에 전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누들로드>가 방영된지도 7년이 넘게 지났으니 영상에 나온 내용과 내가 가서 맛본 면 요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거의 매일 한 번 이상 먹은 부탄의 면 요리 중에 같은 맛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 지역마다 혹은 요리사마다 전부 다른 조리법과 재료를 사용하고 있었다. 익숙한 맛의 간장, 토마토소스에 완두콩, 고추, 당근, 양배추, 브로콜리 같은 신선한 채소들을 넣고 조리한 면 요리들을 나는 대부분 한 가닥도 남겨놓을 수 없었다.



아까 맛있는 감자요리를 내왔던 트롱사 워치타워 식당에서 만들어준 면 요리. 간장과 토마토 맛이 났다.


팀푸 인근 식당에서 먹었던 면 요리. 슴슴한 간장 맛의 밀가루 면이었는데, 면 모양이 동남아 지역의 쌀국수와 닮았다.


파로 전망대 식당에서 먹었던 면 요리. 면이 짧게 끊어져 있는데, 열을 가하지 않는 압출식 면틀을 사용하면 이렇게 면이 조금씩 나오다가 끊어지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트롱사 인근 식당에서 먹었던 새콤달콤한 면 요리. 부탄에서 먹었던 면 요리 중에 가장 서구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이었다.


각종 채소와 면을 이용한 부탄의 요리들이 특별히 맛있다는 느낌이 드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부탄은 농업에서 농약을 쓰지 않는다. 아무것도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모든 작물을 유기농으로 키운다. 정책적으로 전면 유기농업을 선언한 나라는 아마 전 세계에서 부탄이 유일할 것이다.


농약을 대량으로 쓰는 농업은 가만 생각해보면 비정상적인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농작물을 흠집 하나 없는 그림 같은 비주얼로 만들기 위해 많은 화학약품이 뿌려지고 있다. 반들반들한 상품 미학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의 기호를 맞춰야 하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생산물이라면 사람이 그렇듯 상처도 있고 색깔이나 모양도 저마다 다르게 빚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SF 영화 속 말세적 미래에 등장하는 복제인간들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매대에 올라와 있는 작물들을 보면 조금 섬뜩한 느낌까지 든다.



부탄 시장의 농작물들. 동네 사람들이 농사지어 내놓았다.



부탄의 병원을 갔다 온 후 긴 드라이빙을 하자니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때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꿈나라로 안내하는 마법 같은 처방은 이제 한국 일은 그만 잊으라는 부탄 의사의 배려였던가...  나는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덜컹거리는 차 속에서 창문에 머리를 쿵쿵 박으니 잠의 경계 너머로 춘쭈르가 괜찮냐고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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