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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Mar 28. 2017

7. 현실 도피에는 부탄이 제격


이른 아침 눈을 뜨니 객실 통유리 밖으로 갓 떠오른 해가 깊은 골짜기의 곳곳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전날 밤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트롱사 종Trongsa dzong도 그렇게 아슴푸레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내 숙소가 트롱사 종이 위치한 산 중턱의 반대편 자락에 아슬하게 걸쳐있었던 덕에, 나는 누워서도 멀리 트롱사 종을 볼 수 있었다. 구름과 안개에 살짝 가려진 모습이 천계의 건축물인듯 신비로웠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구름의 흐름을 기다렸다. 


dzong은 불교 사원과 행정 관청을 겸하는 부탄 특유의 건축물이다. 대부분 수백 년 전에 지어졌으며 부탄 건축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조형미를 드러낸다. 



멀리서 본 트롱사 종. 위쪽에 트롱사 종을 방어하는 워치타워가 조그맣게 보인다.



부탄에서 가장 큰 종


트롱사는 지리적으로 나라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왕이 동쪽과 중부 지역을 다스리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였다. 그래서 트롱사를 통치하고 종교적 가르침도 전파하는 복합 시설인 종 또한 부탄의 많은 종 가운데서도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처음 지어진 것은 1647년이며 1897년에 대지진으로 심하게 부서진 후 20세기에 몇 차례에 걸쳐 증·개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지금 이곳은 2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수행하는 큰 수도원이기도 하다. 



트롱사 종에서 본 지역의 풍경. 평지가 드문 부탄에서는 이렇게 산비탈을 깎아 물결 같은 계단식 논을 만들어 쌀농사를 짓는다.



부탄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20개 주에 빠짐없이 있는 종 가운데 몇 곳은 가보게 될 것이다. 종은 그만큼 부탄인들의 종교와 문화에 중요한 일부분이고,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 부탄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종을 이루는 건물들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자갈, 나무, 흙만을 사용하는 부탄의 전통 건축법으로 지어졌다. 


또한 모든 종은 한가운데 위치한 센터 타워를 중심으로 왼쪽은 사원, 오른쪽은 행정 관청, 하는 식으로 반씩 기능을 나눠 쓰는 특이한 형태로 세워져 있다. 이렇듯 성스러운 종교 시설인 동시에 관청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출입할 때는 어느 정도 예절을 갖춰야 한다.


트롱사 종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춘쭈르가 까만색 트렁크 가방에서 곱게 접힌 하얀 천을 꺼내 들었다. 입구쯤 가서는 그걸 한참을 탁탁 털고 날도 더운데 두르려고 하길래 뭐냐고 물어봤더니, 일종의 예복을 갖추는 거란다. 현지인들은 규모가 있는 종이나 사원에 들어갈 때 하얗고 긴 스카프를 두른다. 이 하얀 스카프는 부탄인들의 전통의상인 키라(여자) 혹은 고(남자)와 맞춰서 입는 넥타이 같은 의미인데, 고위 관료들에게 예절을 갖추는 의미라기보다는 신께서 나를 볼 수 있도록 두르는 의미가 크다고 한다. 



트롱사 종에 들어가기 전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춘쭈르


트롱사 종의 내부. 이쪽은 사원이다. 작아서 잘 안 보이지만 저 승려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이곳에는 특이하게 타 종Taa dzong이라는 이름의 망루가 200여 미터 위에 별도로 딸려있다. 과거 내부 반란군으로부터 트롱사 종을 지키기 위해 만든 시설인데, 지금의 왕조가 부탄을 통일한 이후 침략 위험이 사라지자 용도를 국립 박물관으로 바꿨다. 



파괴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불교국가인 부탄의 국립박물관은 상당히 인상 깊은 장소였다. 들어가면 부탄에 불교를 전래한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에 관한 이야기부터 부탄 곳곳의 축제 모습까지를 생생하게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대형 스크린에 프로젝터로 쏴서 보여준다. 관객이 나 딱 한 명이었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상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 층에 걸쳐 부탄의 불교 유산과 고승들의 가르침이 다양한 전시품과 함께 설명되어 있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불교 사상을 좋아한다. 불교는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접근으로 인간의 구원을 얘기한다. 불교에서 구원의 권능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 인간이 수행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종교가 불교다. 그래서 신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성불하라(스스로 부처가 되라)고 기도한다. 다만 신적인 존재에게 의지하며 자신의 복을 구하려 하는 현실의 수요가 있었고, 그 수요에 맞춰 변형된 것이 지금 우리가 곳곳에서 보는 속세 불교의 모습이다.


부탄의 불교도 구루 린포체를 비롯해 많은 고승들이 신격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활을 검토하고 바꿔 가는 삶과, 탐욕스러운 삶은 그대로 두고 주기적으로 교당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선택받을 거라 자만하는 삶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종교는 후자의 의미로 남용된다. 하지만 부탄인들에게 불교는 실제로 삶을 돌보는 지침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부탄의 동자승들. 파로 종에서



부탄에 오기 전까지 나 역시 번뇌와 신경증이 많았고 괜한 고민에 휩싸여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좋은 대학에 가고 사랑을 찾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 그렇게 삶의 다음 단계에 올라서면 해소되리라 믿었던 결핍감이 오히려 시간이 더할수록 깊어졌다. 나뿐 아니라 종종 마주치는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과 얘기를 나눠봐도 비슷했다. 인간 삶의 복잡한 암호를 풀고자 그들은 먼 걸음을 옮겨 히말라야의 골짜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 트롱사에서 남녀가 합궁하고 있는 모양의 특이한 불상 아래 적힌 글귀를 보다가 암호 풀이에 도움을 주는 짧은 단서를 찾았다.



마음의 다섯 가지 독 five mental poison

분노와 증오 Angry and Hatred
자만심 Pride
탐욕과 갈망 Greed and Desire
질투와 시기심 Envy and Jealous
무지와 망상 Ignorance and Delusion 

마음의 다섯 가지 독은 파괴하거나 억눌러서 해독할 수 없다. 시간을 두고 받아들이고 그것과 짝을 이루는 좋은 마음으로 변화시킴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나는 불교 경전을 읽다가 종종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식의 진단에 반발감을 느끼곤 했다. 특히 내가 처음 불교 경전을 진지하게 읽었던 군대에서 그런 분노가 컸다. 나를 내 의사와 무관하게, 이 젊은 날 소중한 시간에, 감옥 같은 곳에 가두고 무의미한 노역을 시키는 이 상황을 어찌 탓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경전을 집어던지지 않았던 이유는 마찬가지로 모든 불행의 혐의를 나를 둘러싼 상황에 두는 것 역시 미심쩍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선택하라면 결국 마음의 문제에 집중하는 쪽을 고를 수밖에 없다. 상황을 수용하고 오늘을 다독이며 때를 기다리는 태도의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가르치듯,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나는 그 변화상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볼 수 있을 뿐인데, 마치 지금의 불행한 상황에 내 삶이 결딴난 것처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도 미련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모든 것이 연결되어 변화하는 모습이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에, 그런 믿음을 갖고 시절의 연을 기다리는 것이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박물관에서 이 불화를 본 순간 발을 뗄 수 없었다. 불교의 육도윤회六道輪廻 사상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천상도, 인간도 등 인간이 생전의 업보에 따라 여섯 개의 길을 돌고 돌게 된다는 것이 육도윤회다. 끝없이 뭔가를 먹어 삼켜야 하지만 목이 실처럼 가늘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아귀도, 아예 의식성이 없는 동물로 태어나 끝없이 부림 당해야 하는 축생도, 108개의 지옥에서 갖가지 끔찍한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지옥도… 생은 고통이라, 인간도人間道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하며 설명을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조금 뜻밖이었다. 



인간도는 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human world it is only in this sphere that it is possible to leave the cycle.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 평안을 얻는다.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다. 생의 본질을 고통이라 본 석가모니가 이런 인간의 삶 안에서만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인간도에 사는 나는 무엇이든 집어삼키면서도 영원히 충족하지 못하는 아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석가모니의 말대로 이렇게 살다가도 언젠가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종교의 성인들은 가르친다. 오로지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조타해갈 수 있는 인간의 삶 안에서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말이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을 발견한다. 욥은 신들의 장난으로 자식들이 죽고 끔찍한 질병에 걸리는 고초를 겪는다. 그때 욥은 신을 욕할 수도 있었고 언젠가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지킬 수도 있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믿음을 지켰고 결국 모든 잃어버린 것들의 부활과 함께 삶을 되찾는다. 지금 아귀처럼 살고 있더라도 인간은 이렇듯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실은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온 부탄, 트롱사의 한 작은 박물관에서 뜻밖의 배움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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