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골 기념품점을 지키는 스물셋 엘리트 초키
먹구름이 가린 하늘에서 가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원은 적막했고 이따금 들리는 종소리가 경내를 떠돌다 흩어졌다. 입으로 기도문을 외며 교당의 둘레를 자분자분 걷는 사람들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나풀거렸다. 구름 위를 걷는 신선 같은 발걸음이었다. 이곳의 이름은 잠배 라캉Jambay Lhakhang. 마이트리아Maitreya를 모시는 곳이다. 우리말로 미륵불을 뜻하는 마이트리아는 중생을 구제하고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는 보살이다.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이 오면 그때는 억압받는 민중이 세상의 주인이 된다. 56억 7천만 년은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한편으로 이 시간은 인간이 겪어야 할 혼탁한 고통에 끝이 없음을 뜻하고, 한편으로는 언젠가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아련한 희망을 담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긴 시간이 흘러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을 때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오는 마이트리아는 고통받는 각국 민중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운주사에서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못한 와불이며, 조선조 말기 봉기를 일으켰다 학살된 농민들의 혁명적 우상이기도 했다.
잠배 라캉의 둘레를 돌며 기도하는 할아버지
내벽에 그려진 벽화가 특이한 느낌을 준다. 다른 나라의 사찰에 가면 수십 년 사이에 그림을 다시 그려서 색이 선명한데, 잠배 라캉의 불화들은 그린 뒤 한 번도 덧칠을 하지 않아서 처음 상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 그린 당시에 색이 별로 없었는지 단순한 느낌인데, 그렇게 4백여 년에 걸쳐 낡아가는 동안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면서 고풍스러운 멋을 갖게 된 것이다.
잠배 라캉은 부탄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가운데 하나다. 춘쭈르에 따르면 7세기에 티벳왕이 창건했는데, 외부의 침입이 없어서 별다른 파괴 없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불화 또한 그렇게 처음의 모습을 보존해 온 것이다.
신발을 벗고 복장에 예를 갖춘 뒤 교당에 들어갔다. 토굴 같은 컴컴한 복도를 따라 걷자니 담백한 흙냄새가 콧속에 밀려든다. 한가운데 있는 방에 이르니 자연광 한 줄기가 들어와 의식을 거행하는 십수 명 승려들의 윤곽을 그려냈다. 노란 승복에 갈색 스카프를 두른 승려들이 두 줄로 마주 보고 앉아 금속으로 지은 현악기를 붙들고 있다가 이따금 한 번씩 나무 막대기로 둔탁하게 내리쳤다. 쟁 하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갈 때, 곳곳에 피워 올린 허연 향 연기가 음과 얽혀 흩어졌다.
붐탕에서 만난 친구
여행도 절반이 흘러갔고, 나는 부탄의 한가운데를 지나 동쪽에 좀 더 가깝게 왔다. 이곳의 이름은 붐탕Bumthang이다. 붐탕은 부탄의 고유어인 종카어로 아름다운 평원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처럼 부탄에서 보기 드문 너른 평지에 집들이 들어서고 마소 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실제로 붐탕은 부탄의 20여 개 주 가운데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드는 곳이라고 한다.
붐탕에는 이렇게 동물들이 자유롭게 방목돼 있는 목초지가 많다.
붐탕에서 유명한 잠배 라캉과 쿠르제 라캉Kurjey Lhakhang을 둘러보고 나오니 오후 세 시쯤 되어있었다. 그냥 들어가긴 아쉬운 시간. 이따가 붐탕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는데 그래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사원 앞 작은 수공예품 점에 들렀다.
아홉 평쯤 될까 싶은 아담한 가게에는 직접 만든 다양한 기념품과 옷, 스카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외국인의 눈으로 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뻔한 기념품만 있는 우리나라 관광지와 달리 개성 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붐탕은 실제로 직물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고, 가내수공업으로 직접 만든 공예품을 수출도 한다니 좋은 물건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파는 물건들 대부분은 가게 주인의 형제자매들이 직접 만든 거라고 했다.
처음 내가 이곳저곳 구경을 하는데 나를 따라다니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카운터에 좀 앳돼 보이는 여자가 하나 앉아있었는데 눈망울이 커서 호기심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웬 외국인 아저씨가 와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도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전통 문양의 노란색 스카프를 하나 들고 가격을 묻자 반갑게 일어서며 이 스카프는 여왕이 예복에 두르는 스카프를 본떠 만들었다고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여줬다.
그 작은 대화를 시작으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부탄의 많은 곳에서 그러듯 손님을 반기는 의미에서 전통주인 아라ara를 따라줘서 두어 잔쯤 마시니 살짝 알딸딸해지면서 뭔가 더 많은 얘기가 술술 풀려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올해 스물세 살이라는 그 아가씨의 이름은 초키choki. 부탄 사람 중에서는 큰 키의 초키는 하얀색 미키 마우스 티셔츠에 데님 셔츠를 걸쳐 입고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 같았으면 이런 복장에 흔히 블랙진 정도를 입겠지만, 부탄 사람인 초키는 여성의 부탄 전통 의상인 키라를 아래에 받쳐 입었다. 그 복장의 묘한 어울림에 웃음이 났다.
다른 지역에서도 기념품점에 몇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젊은 여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로서는 부탄 친구를 만들 기회가 생긴 게 반가웠다. 또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이미 정주행 했다는, 그래서 서울에 한번 가보는 게 평생의 꿈이 됐다는 초키로서는 한국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게 좋았을 것이다. 비록 어느 한가한 오후의 방문객이 유시진 대위는 아니었지만 아주 약간 신기한 느낌은 들지 않았을까?
실업자 초키
알고 보니 초키는 부탄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경영학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다만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공부한 것에 맞는 괜찮은 직장을 찾지 못해서 자리를 찾을 때까지 부모님의 기념품점에서 일을 거들고 있다고 한다. 집이 가게와 붙어 있어서 나는 그의 어머니와도 인사를 나누게 됐다. 급하게 키라를 두르고 나온 어머님은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다만 농사가 아니라 수공예품을 만드는 일을 해오셔서 그런지, 얼굴이 뽀얗고 눈매가 고운 인상이었다.
초키는 학교가 수도 팀푸 근처에 있어서 대학 내내 기숙사 생활을 했다. 수년간 떨어져 있던 딸이 다시 돌아와 모처럼 같이 지내고 있었던 상황. 어렵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온 딸이 이렇게 시골 마을의 가게를 지키고 있는 지금을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영어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여서 초키를 가운데 세워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모처럼 따님하고 같이 지내게 돼서 좋으세요?” 하고 여쭤보니 어머님이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지금은 좋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복잡한 마음이 느껴졌다.
부탄의 청년 실업률은 9.6%(2013)로 낮지 않은데, 통계 기준이 달라서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나라(2015)와 비슷한 수치다. 다만 초키 같은 경우는 실업률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 이런 경우를 굳이 분류하면 잠재적 실업자라고 하는데, 알바든 부모님을 거들든 당장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업자로 넣지 않는 것이다.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거나 가게를 운영하는 집이 많은 부탄에서 초키처럼 가업을 돕는 청년들이 많을 것이니, 실제 미취업자는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탄의 한 직물 가게에서 본 아기자기한 옷 모양의 술병 커버
최근 부탄에서는 젊은이들이 술과 마약을 해서 문제가 되는 사건*이 많다고 한다. 작년 부탄에서 검거된 마약사범은 인구 70만 국가에서 천여 명에 이른다. 자살도 문제다. 2013년 부탄의 자살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13명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26.5(2015년)명 수준에 비하자면 훨씬 낮고, 나라 전체로 보면 90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니 많은 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거에 비해 빠르게 늘고 있어서 정부에서도 대책을 세우고 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높아진 교육 수준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교육을 받으면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 따라서 교육을 받은 이후의 취업 실패는 한층 더 좌절감을 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스마트폰이나 TV로 다른 나라의 세련된 문화를 다양하게 접한 젊은이들은 부탄의 현실에 불만을 가지기도 쉬울 것이다. 이런 영향인지, 시골 문화에 지루함을 느껴 도시로 거처를 옮기는 젊은이들도 갈수록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도시로 온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몸을 쓰는 건설업, 농업 분야의 일 외에 적당한 자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지금 부탄의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약물이나 술이 만들어주는 일시적인 망각의 세계로 도망치는 것 아닐까. 팀푸에 들어온 첫날 “밤에는 문제가 많다”던 페마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물론 길가에 대마가 지천으로 널린 부탄은 마약에 대한 처벌이 굉장히 엄격한 편이어서 처벌자가 많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도 춘쭈르가 길가다 대마 잎을 따줘서 씹어봤다. 처음에는 겁나서 살짝 맛보고 말았다. 겁내는 내가 웃겼는지 자꾸 주길래 잎을 여러 개 우물우물해봤는데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마불감증?)
똘똘한 아이의 가르침
하지만 나는 초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나라의 어느 스물세 살과 얘기 나눴을 때도 느끼지 못한 어떤 내적 안정감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이번 여행에서 부탄의 학생들, 혹은 이삼십 대 청년들과 얘기를 나눌 때 거의 비슷하게 느낀 부분이었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2차 고등학교(Secondary high school, 부탄 교육 편제상 고등학교 2~3학년 과정)에 다니는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국제공항이 있는 도시 파로에서 햇살 좋은 오후에 파로 종 근처를 산책하고 있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까까머리 남학생이 어딘가 친숙하게 느껴져 말을 걸어본 것이다.
기본 신상을 교환하니 대뜸 한국 걸그룹 얘기를 꺼낸다. 오호라, 뭔가 금세 친해질 것 같은 느낌. 그렇게 마음의 벽을 허문 뒤, 학년이 11학년(고2)이라길래 대학은 어쩔 거냐고, 뭔가 코리안 아재스러운 멘트를 나도 모르게 던지고 말았다. 그랬더니 녀석이 인도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러 갈 거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것 아닌가. 가끔 나조차도 잊지만 어쨌거나 내 전공이 컴퓨터공학이므로 공자왈 맹자왈 아는 척을 좀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이미 컴퓨터공학에 대해 (어쩌면) 나보다도 더 많이 아는 듯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도에서 컴퓨터 배운 사람들이 미국으로 많이 가는데, 너도 다른 나라로 떠날 생각이 있어? 하고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밖에 나가서 더 넓은 세상을 접해보고 싶지만 다시 돌아와 “부탄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너나없이 헬조선, 탈조선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문화충격일 수밖에 없는, 뭔가 새마을운동스러운 멘트가 아이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게 의아해서 재차 물었다. 리얼리? 돈츄?
아이의 말인즉, 자신은 요즘 인도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곳곳에서 일하고 가르치는 게 그렇게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외국 문화가 섞이고 새로운 세계를 아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 고유의 문화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문화를 잃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잊게 돼요.”
헛… 한물간 국뽕 광고에나 나올 법한 이 멘트. 만약 우리나라에서 누군가한테 이런 말을 들었으면 오글거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에는 진심과 확신이 담겨 있어서 내게 별다른 의문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만남 이후, 부탄 사람들의 건강한 정체성과 안정된 느낌의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건물 짓는 모습. 건축을 보면 전통을 지키기 위한 부탄 사람들의 고집이 보인다. 부탄에서 지어지는 모든 건축물은 부탄 전통 문양의 창문과 지붕 양식을 따라야 한다.
훗날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초키와 몇 통의 메일을 주고받았다. 초키는 내가 떠난 직후 붐탕 지역에서 큰 축제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축제가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와서 즐기고 축복을 받았는지를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뿐만 아니라 우기가 지난 후 가을에 부탄의 하늘이 얼마나 파랗고 아름다운지, 왕과 왕비가 붐탕에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성대하게 환영식을 열었는지를 옆에서 재잘대듯 즐겁게 얘기해줬다.
이것은 확실히 초키만이 가진 것에 대한 확신이며 자랑스러움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서울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해달라는 초키의 조름에 광화문이나 경복궁을 얘기하기는 좀 쑥스러웠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공들여 배우거나 일상에서 그것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잠실에 지어진 100층이 넘는 빌딩의 높이나 유명한 건축가가 지었다는 동대문의 특이한 건물의 사진이 그나마 서울에 대해 내가 그에게 얘기할 수 있는 독특한 이야깃거리에 속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사는 이 문화만이 가진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나를 이루는 것들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다른 존재들과의 공통성을 느끼면서도, 안에서 빛을 내는 유일한 정체성을 품고 있어야 내 존재가 가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소비지향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과 욕구를 가진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길들여진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특별함을 느끼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렇게 확인하는 각자의 차별성이란 고작해야 애플폰과 삼성폰 정도의 차이에서 오가는 것 아닐까.
손 안에서 밀려들 변화
우리의 문화를 잃으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게 된다는 아이의 말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 우연히 고민이 깊은 아이를 만나게 되어 들은 얘기는 아닐 것이다. 전통과 문화의 의미에 대해 부탄은 어릴 때부터 공들여 교육하며 단단한 정체성이 자리 잡도록 만든다. 내가 부탄 사람들로부터 느낀 내면의 안정감과 자부심은 아마 그들 고유의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자각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물론 초키의 손에 들려 있었던 아이폰은 본능을 자극하는 스펙터클의 공세로 그의 미적 감수성을 뒤바꾸고 그들의 문화를 지루하고 후진 것이라 믿게 만들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강할까. 결국 어느 쪽이 승리할까.
적어도 지금까지, 하반신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자본주의는 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부탄은 그 모든 싸움을 다 지켜본 후에 인류가 쌓은 교훈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있다. 문화와 경제적 상황이 비슷했던 옆 나라 네팔이 빈곤과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게 되는 동안, 부탄은 거리에 걸인 하나 보이지 않는 사회 안전망을 만들었고 세계에서 드물게 야생 호랑이 개체 수가 증가하는 천혜의 환경을 지켜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가장 많은 수의 국민이 행복을 느끼는 나라로서 훌륭하고 면밀하게 그 싸움을 이끌어오고 있다.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부탄 역시 거대한 혼란을 맞이할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변화의 속도이며, 한번쯤 멈춰서 자신들의 영혼이 뒤따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가 그 변화의 고삐를 잡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적응에 뒤처진 사람들이 늦게라도 따라오면서 생계를 이어갈 자리를 찾을 수 있고, 새롭게 만들어진 문화로부터 이격되지 않도록 다독여주는 공동체를 만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쉽게 불행해지지 않으리라. 한국에는 그 모든 것들이 부재했다.
정말 예뻐서 여러 권 사온 수제 노트
이날 나는 폭풍쇼핑을 했다. 좋은 친구를 만나서 그런지 아라를 몇 잔 마셔서 그런지, 이것저것 예뻐 보이는 물건들이 많았다. 구매력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못난 습성을 여기서도 슬쩍 드러내기도 했고. 어쨌거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해줄 순간을 생각하며 특별한 물건들을 고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쉽게 인사를 나누고 훗날 연락할 것을 약속하며 나서는데, 초키가 급하게 공예품 몇 점을 집어 가방에 넣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