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였다. 아파트 입구에 쓰레기가 쌓여가자 희망아파트 주민들은 반상회를 열었다. 자자, 오늘 첫 번째 안건을 얘기해봅시다. 요즘 입구에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쌓여있던데 좀 치워야겠어요. 근데 늘 깨끗했는데 요즘 왜 이렇게 지저분해진 거죠?
니탓이다 니탓이다, 공방이 오간 뒤에 201호 새댁이 말을 받았다. 저기... 제가 새벽에 일을 다니잖아요. 저번에 보니까 101호 할머니가 새벽에 빗자루 들고 청소를 하시더라고요. 요즘에는 할머니가 안 보이시던데? 새댁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웃들은 문득 101호 할머니가 한동안 눈에 띄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쾅쾅쾅!
이웃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독거노인 김씨 할머니의 집 문을 두들겼다. 할머니 혼자 죽은 거 아니야? 요즘엔 노인네들 혼자 있다가 가는 일이 많다던데.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저녁 시간임에도 불은 꺼져있고 응답은 없었다. 열쇠장이가 왔고, 문을 따고 들어간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텅-빈, 인기척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정적뿐이었다.
아니 집에만 있던 할머니가 왜 없어지냐구. 수군수군. 아니 사라질 거면 얘기나 해놓고 가야지 뭐야 불길하게... 관리사무소에 모여 아파트 들머리에 설치된 CCTV 녹화 영상을 기다리던 이웃들이 불만 반 불안 반으로 수군거렸다. 이어 CCTV를 살펴본 동네 파출소 양 순경이 나타났다.
제가 며칠 치만 후딱 돌려봤는데요, 웬 젊은 남자가 몇 번 할머니 집 쪽으로 드나들었는데 여기 주민은 아니랍니다. 저희가 본서에 의뢰해서 좀 더 조사를 해 보고 금방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그만들 들어가시죠. 웬 남자라는 말에 이웃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상에, 이게 웬 일이야. 그럼 납치? 아니 이 아줌마가 재수 없게. 조사를 좀 더 해봐야 한다잖아요. 아니 그럼 모르는 남자가 우리 아파트엔 왜 드나들었어. 이웃들은 그날 밤, 평소보다 더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로 각자의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음 날 오후, 경찰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신원 미상의 30대 스포츠머리 남자가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아파트에 자주 드나들었음이 확인됐다. 어허... 요즘 치안도 불안한데 이것 참. 경비 아저씨는 뭘 한 거야. 불똥이 자신에게로 튀자 사람 좋아 뵈는 경비 아저씨가 머쓱하게 웃는다. 그리고 102호 아줌마. 아줌마는 할머니가 몇 주째 안 보이는데 그걸 계속 몰랐어요? 이번엔 불똥이 앞집 아줌마한테 튄다. 열 받은 아줌마. 아니 이 아저씨가 왜 나한테 화풀이야! 나 살기도 힘든데 그 할머니가 땅으로 꺼지는지 하늘로 솟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반장이 나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할머니도 할머니지만 우리가 앞으로 맘 놓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어요? 일단 감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CCTV를 두어 대 더 달도록 합시다. 반장의 말이 끝나자 다른 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구청에다 전화해서 가로등도 좀 밝은 걸로 더 달아달라고 해요. 이 동네 너무 어두워. 못 산다고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주민 불안 해소를 위한 대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CCTV 세 대가 증설됐고, 경비원이 잘린 뒤 열 살쯤 어린 해병대 출신의 60대 할아버지가 새로 왔으며, 청소는 그 할아버지의 몫이 됐고, 구청은 군말 없이 가로등을 늘려주었다. 이래저래 감시하는 눈은 늘었지만 할머니의 안부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건 발생 2주 후,
문제의 30대 남자가 나타났다. 까까머리의 남자는 아파트 앞 큰 길가에서 순찰 돌던 순경들한테 잡혔다. 주민들은 역시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나는 법이라며, 그가 정말 할머니를 납치한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날 밤, 까까머리 남자는 경찰 둘을 앞세우고 아파트에 나타났다. 선한 인상의 남자는 웬 보따리를 하나 들고 연신 주민들한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더. 지가 부산에서 일한다꼬 울 어매를 거의 못 찾아왔어예. 그래도 휴가 받아가 어매 여행 한 번 시켜드린다꼬 모시고 나왔는데 일이 이리 커질지 생각도 몬했슴니더.
이웃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범인으로 생각한 젊은 남자는 할머니의 늦둥이 아들이자 유일한 혈육이었고, 할머니는 아들과 여행 중 고향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눌러앉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지 어매가 아부지 가시고 나서 서울 생활 너무 힘들어하셔서예. 외로움 많이 타셨다 아입니꺼. 그러면서 범인은 보따리를 풀어 내밀었다. 이거 어매가 하신 떡입니더. 인사도 몬하고 가서 미안하다꼬, 꼭 집집마다 들러가 떡 한 접시씩 돌리라꼬 하셨습니더. 정성스레 매듭지어진 보퉁이를 풀자 촉촉한 팥소가 넉넉하게 올려진 시루떡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말을 잃은 이웃들은 떡을 집어 들 면목이 없어 그저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준비해온 일회용 접시에 떡을 한 움큼씩 옮겨 담던 남자는 딱 한 마디만을 아쉬운 듯 덧붙였다. 근데 쪼메 섭섭하긴 하네예. 저도 여기서 어매랑 십 년은 살았다 아입니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