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한쪽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원 Dec 26. 2017

강남역 2번 출구, 편의점에서 생긴 일

2012년 8월 10일


# 남자


나는 그 여자를 좋아한다. 새벽마다 담배를 사가는... 늘 맨얼굴에 가벼운 츄리닝 차림이지만 살짝 쌍꺼풀이 진 선한 눈매와 약간은 지쳐 보이는 그 희미한 웃음이 마음을 끈다. 이렇게 마주치기도 일주일에 두세 번, 두 달이 지났다. 종종 그 여자는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느리게 피웠고, 나도 몇 번인가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맞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밤에 잠이 잘 안 오나 봐요. 덥죠 요즘. 그럴 때마다 나눴던 우리의 짤막한 대화가 여자의 마음에 빗장도 조금씩 풀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주하면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희미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이 쓸쓸해 보여 나는 어느새 그녀가 오지 않는 날에도 가게 앞 거리를 살피곤 했다.


# 남자


새벽에, 그것도 담배를 사면서 마주치는 여자와 편의점 알바의 관계이긴 하지만, 뭐 그것이 특별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 가볍지 않게... 무언가 그 쓸쓸함의 한 구석을 채워주고 싶다.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말을 꺼내기로... 아니 그건 좀 부끄러우니까 돌아가는 뒷모습에 편지를 건네기로 한다. 편지를 써서 그 여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새벽 두 시. 여자가 오가던 시간이 왔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지 멀리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벌써부터 다리에 힘이 풀려 계산대를 붙잡고 간신히 선다.


편지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약간은 당황한 낯빛의 여자에게 나는 썩은 웃음을 지어 보였고, 가게를 나갔다가 여자가 잠시 후에 되돌아왔던 것 같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싸늘한 표정. 미동도 없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여자는 내게 몇 마디를 쏘아붙였다. 편의점 알바나 하는 주제에... 누굴 구원이라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겨워 정말... 뭐 이런 말들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내게 던지다시피 구겨진 편지가 돌아왔고... 여자는 그렇게 깜깜한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여자


이제는 그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가지 않는다. 새벽에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누우면 늘 잠이 오지 않아서 담배나 사고 바람을 좀 쐬려고 찾던 편의점이었다. 일주일의 절반은 아침에 일이 끝나다 보니 이렇게 저녁 타임으로 일하는 날은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룬다. 그날도 별생각 없이 그렇게 찾았던 편의점이었다. 내 또래쯤 돼 보이는 남자... 나쁜 사람인 것 같지 않고 늦게까지 일해서 돈 버는 모습도 착실해 보였다. 그런데 어제 그 남자가 내게 편지로 고백을 했다. 나는 약간 당황했고, 그렇게 나가서 편지를 읽는 순간 갑자기 왜 그렇게 화가 났던지... 정신없이 몇 마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쏘아붙이고 가게를 나왔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일이다.


그저 남자들한테 지쳤을 뿐이다. 그날도 초저녁부터 세 명을 상대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도 내 겉모습에 홀려 사랑하는 척하는 많은 남자들을 만나봤고, 그들은 늘 내가 외로워 보인다고, 그 자리를 채워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강남 룸살롱의 작부였고 그런 남자들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잠깐... 내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거나, 혹은 질리지 않은 섹스 상대가 필요할 때까지 뿐이었다.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시간까지 무슨 일을 하다가 오는 지를 알고 싶어 할 것이고, 감추면 화를 낼 것이고, 어느 순간 알게 되면 나를 떠나겠지. 외로워 보인다고? 미칠 듯 외로워서 화가 났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 때문에.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 그럴 수 있는 신조차 없다.


# 남자


지갑이 가벼울수록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게 인생이다. 새벽 네 시, 고단한 몸을 이끌고 편의점을 나선다. 그 여자는 편지를 건넨 이후로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이 앞을 지나치는 것도 불쾌해할 테지... 그 날 그 여자의 말을 듣고 나서는 그저 멍할 따름이었지만, 한 이틀 생각하다 보니 나도 문득 화가 났다. 편의점 알바가 뭐?... 힘들게 공부하면서 일하고, 지긋지긋한 알바천국에서 이 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얘기 들을 만큼 막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다. 그다음 날이던가. 라면을 후루룩... 먹는데 눈물이 났다. 그러다가 다시 화가 났다가... 한동안 마음이 헛헛한, 그런 느낌이었다. 어쩔 수 있나. 결국은 내가 못나서 그런 거다.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걷기가 힘들어 잠시 멈춰 섰다. 아무도 내가 있는지 모른다. 옷장에 처박힌 낡은 옷처럼 쓰임도 부름도 없는 삶이 되어버렸다.


...는 생각을 하는데, 그때였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분명히 그녀였다. 짙은 화장과... 유니폼처럼 뭐하는 사람인지를 확실히 말해주는. 속이 비치는 짧은 화이트 원피스. 그 여자는 그렇게 어느 검은 차에서


버려졌다.


내렸다기보다는 확실히 버려졌다는 느낌이다. 2차선 도로의 건너편에서... 이 년이 술이 떡이 되가지구... 어떤 남자의 욕설이 몇 마디 이어졌고, 쌀쌀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가까이 다가간다. 이 여자...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였구나.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옷차림과 얼굴... 나는 놀라서 깜깜한 새벽 네 시의 밤거리에 고드름처럼 서 있었다. 갑자기 어기적, 몸을 움직여 움츠러드는 여자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외투를 벗어 여자에게 다가간다. 술냄새, 담배냄새... 그리고 어느 남자의 비릿한 정액 냄새까지...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여자의 몸을 일으켜 옷을 입힌다. 나를 무시했던 여자... 고작 이런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거였나. 마음이 복잡했지만 나는 여자를 들쳐업는다. 집이 어디예요... 물론 말이 없다. 해 뜰 때쯤 되면 정신을 차리겠지. 벤치에 앉혀두고 그냥 갈까 생각했지만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보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신이 없다면 인간이라도 곁에 있어야겠지. 추운 몸을 서로 녹이며 우리는 해가 뜨기를 기다린다.





한 페이지 소설. 습작 01번. (2012)





매거진의 이전글 열다섯 살의 나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