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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Dec 30. 2017

열다섯 살의 나에게


#1


쨍그랑.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간다. 나는 방 한쪽에 꼼짝않고 웅크려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고받는 막말들이 방 안을 위태롭게 채운다. 내가 가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더 이상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 끄트머리 쯤에 이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언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내 최초의 기억이었고, 그 방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는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무력하게 기억되곤 한다. 그 후로도 기억의 모양새는 많이 달라지지 못했다. 최초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비슷한 기억들이 반복된 게 내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욕을 하거나 누나한테 뭔가를 집어던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떨리는 가슴이나 겨우 쓸어내릴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권위적이고 종종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내 아버지 앞에 한 마디도 대들지 못한 나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혼자 방으로 돌아와 느끼는 머릿 속을 하얗게 채우던 분노, 철저한 약자였던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가슴아픈 연민... 이런 것들이 내 유년기를 채우는 마음의 조각들이다.


#2


내가 그 형을 만난 건 열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동네 초입의 쓰러져가는 빈 집에 자리잡은 그는, 초라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늘 책을 읽고 있어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골방철학자라고 불렸다. 더부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빈집이라기가 민망할 정도의 폐가에 자리잡은 그 남자. 나는 처음에 그가 좀 무서웠다.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아마 등교길에 마주치는 일이 늘면서였던 것 같다. 내가 아침에 바삐 학교로 발걸음을 옮길 때면, 그는 담장 밖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나를 보며 씩- 웃곤 했다. 처음엔 흠칫. 뒷걸음질 치며 놀라던 나도 언젠가부터는 고개를 까딱하며 답을 보냈다. 그해 여름부터는 종종 가벼운 대화를 주고 받았고, 그 형이 꽤 웃긴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건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대들고 집을 뛰쳐나온 날이었다. 어느날 누나가 중간고사 성적표를 가져왔다. 아버지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내내 반에서 삼사십등을 오가는 누나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일터에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아 온 아버지는 자기 화를 참지 못했다. 수많은 말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부서졌다.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흩어졌고, 화분이나 컵 같은 것들이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문득 묵혀만 왔던 분노가 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림을 느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처음으로, 나는 늘 내가 마음 속에서 상상하던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나는 손에 잡히는 뭔가로 아버지를 내리쳤다. 무릎이 꺾인 아버지가 머리를 움켜쥐고 뒤를 돌아봤고,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나는 그가 한 손을 들어 나를 내리치려는 찰나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정신이 돌아온 것은 어머니가 나를 뒤에서 끌어 안으며 붙잡았던 순간이었다. 일순 정적이 흘렀고, 나는 거칠게 문을 박차며 집을 나왔다. 한참을 거리를 헤매던 내 발걸음이 닿은 곳이 바로, 골방철학자의 집이었다.


#3


그가 없었다면 나는 그해 가을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있기 힘들었던 나는 학교가 끝난 뒤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얘기하거나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내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나는 이렇게 깊이 내 얘기를 누군가한테 들려준 적이 없었지만, 그 앞에 있으면 마음의 무장을 해제당한 것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왔다. 마음의 상처 위로 조금씩 새살이 돋던 때였다.


그렇게 사이좋던 우리도 겨울이 올 즈음이었을까, 한 번 부딪히는 일이 일어났다. 싸웠다기 보다는 형의 말에 반발감을 느낀 내가 토라졌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그 즈음 나는 늘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집을 나간다, 지방의 기숙학교에 간다, 등등의 이런 저런 구상들을 밝혔지만 그는 내게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너는 평생 아버지를 벗어날 수 없어. 네? 평생...이라구요?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나는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믿었던 형이 그렇게 단정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안 보이는 곳으로 간다 해서 네가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건 아니야. 살아가는 내내 너는 그의 비난의 목소리라든가, 그로부터 인정받았을 때의 충만한 느낌 같은 것들과 마주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너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지금보다 아주 조금도 자라지 못한 채로 평생 살아가게 될 거란다. 고통스럽겠지만 그걸 받아들여야 해.


늘 틀리지 않았던 그의 말이 아마도 맞을 거라고, 열다섯 살의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지만. 그 때의 내 마음은 그것을 인정할 만한 힘이 없었다. 잔뜩 내가 하고 싶은 말 만을 그에게 쏟아놓은 채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


#4


형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채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등. 처음으로 그 등수가 찍힌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아든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성적표를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내 마음에서 나도 모르게 떠오른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는 마음 깊이 그로부터의 인정을 원하고 있었다. 흐르는 정적 속에서 나는 형의 말을 하나씩 곱씹어보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고, 결국 나는 며칠만에 형의 집을 다시 찾았다.


집에 들어서는데 입구에 이삿짐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뭐지? 나는 뛰어들어가 형을 찾았다. 그는 책장의 책들을 옮겨담고 있었다. 형, 어디 가요? 쭈볏거리며 다가서는 나를 형은 반갑게 맞이해줬다. 짜식, 삐져가지구 뛰쳐나갈 땐 언제구 지 발로 걸어들어와? 사내놈이 존심도 없냐? 형은 장난스레 나를 비꼬면서도 내심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근데 형 어디 가냐니까요? 그래 나 이제 돌아간다. 돌아간다뇨? 간다구~ 내가 살던 멀티-유니버스로...! 형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건 또 뭔 헛소리인가 생각했지만... 어쨌든 형이 떠나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마지막으로 많은 얘기를 했다. 나는 형한테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또 정말로 아쉬웠지만 부끄러웠기 때문에 가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형이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또 웬 맥주캔을 하나 따서 나에게 건넸을 때, 나는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형 같은 사람이... 늘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얌마, 내 나이가 서른인데 맨날 너같은 시꺼먼 중딩이나 상대해야겠냐? 칫. 형은 낄낄대며 웃었다.


나는 처음 먹어본 맥주가 맛있어서 홀짝이며 금방 캔을 비웠다. 맥주캔을 하나 더 따서 건네며 그가 다정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K야. 

네?

나는 너를 떠나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사가는 거 아니에요?

뭐 그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거란다.


그가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종종 힘들 때면... 네 마음이 가진 밝은 면을 보렴.


사람들은 힘있는 사람 앞에서는 그가 옳든 그르든 쉽게 복종하려고 해. 하지만 너는 네 아버지 때문에, 어떤 권위든 먼저 의심하고 아니다 싶을 때는 싸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거야. 또 그렇게 힘을 휘두르는 사람 때문에 고통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 너는 그런 삶들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될 거란다.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어. 너는 네 마음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중에서 네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어. 나는 그걸 말해주려고 열다섯 살의 너를 찾아온 거야.


형은 그렇게 떠났고,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몇 가지 더 남기고 갔다. 아직도 나는 어려서 형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나라는 것. 형의 그 말 만으로도 나는 내 삶을 마주할 작은 용기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를 떠나는 게 아니라는 형의 마지막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살다가 다시 형을 만날 수 있을까?





한페이지 소설. 습작 0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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