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고독한 청소. 시급 1만 9천9백 원, 경력 무관 알바 대환영. 아니 이 불황에 최저임금의 두 배에 육박하는 꿀알바의 정체가 뭐냐. 눈이 번쩍 뜨였다. 옳거니, 이거다. 방에 쌓인 쓰레기 더미를 발로 휘휘 저어 치우고 낡은 폰을 꺼내 든다.
사람한테 전화를 하는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할 때쯤 나이 든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아... 네. 1만 9천9백 원 확실히 맞다구요. 거짓말 아니죠? 아 네네. 제가 좀 떼인 돈이 많아서. 뭐하는 거예요 근데? ...네. 혼자 살다가 죽은 사람들 짐 치우고 청소하는 일이요. 네, 신체 건장하죠. 비위요.. 그거 저만한 사람도 없을 걸요? 사장님 시체 닦아 봤어요? 네네.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이로써 한동안 밥 걱정은 해결이다. 편해진 마음으로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혼자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라... 요즘 많긴 한가 보구나. 문득 이 텅 빈 방 안에 혼자 있는 내 처지가 떠올랐다. 간간이 나타나 생활비를 던져주던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살림을 차려 떠났다. 나는 스스로 연락을 끊은 뒤 아무에게도 손 내밀지 않고 혼자서 근 십 년을 살아왔다.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그럼 나 같은 알바생이 와서 방 청소는 해주려나. 문득 씁쓸해지는 마음을 흩어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처지에 내일 걱정은 사치일 뿐.
2.
죽은 남자의 방문을 여는 순간, 지독한 시취가 코 속의 점막을 빈틈없이 찔러댔다. 이 일을 의뢰했다는 집주인 아저씨는 열 걸음쯤 뒤에 서서 계속 구시렁댔다. 왜 재수 없게 남의 집에서 뒈지고 난리야. 아니 죽으려면 어디 밖에 나가 죽든가. 보증금도 다 까먹은 주제에...
남자는 죽은 지 반년이 지나서야 발견됐다고 했다. 보증금을 다 까먹고 더 이상 까일 돈이 사라진 후에야 집주인은 남자의 방문을 두드려 본 것이다. 혈흔과 벽에 밴 시취까지 제거하는 백만 원짜리 일이라고, 싱글벙글하던 사장의 얼굴이 집주인과 묘하게 겹쳐졌다. 그래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신나게 살아야지. 참 명랑한 세상이다 x발. 혓바닥까지 나온 욕지거리를 꿀꺽 삼키고 대신 한껏 가래침을 끌어올려 집주인이 신고 있던 슬리퍼 앞에 퉤 하고 뱉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시작했다. 제가 치운다구요! 나는 장비를 챙겨 서둘러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 방과 다를 바 없는 어느 가난한 남자의 평범한 반지하 방이다. 다만 여름이 지나며 흘러내렸을 남자의 체액이 방바닥에 말라붙어 있었다. 썩은 체액, 벽에 밴 지독한 악취가 이곳에서 부패해 사라진 이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방 안 가득한 정적... 아무것도 없는 것이 침묵인 줄 알았는데 침묵이 가득해서 숨이 막혔다.
어디부터 청소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돌리다 보니 문득 거울에 꽂힌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봄꽃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죽을 때까지 덮어놓지 않았던 사진이다. 아마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을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봤을 사진 속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남자는 왜 이렇게 혼자 쓸쓸하게 죽어야 했을까. 사진을 내려놓으려 다가가니 그 옆에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보였다. 누런 갱지에는 삐뚤빼뚤한 작은 글씨로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나는 메모지를 한참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31일이라면 일주일 뒤인데 이게 무슨 날짜일까. 갑자기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3.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도 열린 듯. 지상을 향해 작게 난 창으로 햇살이 들어와 남자가 누워있던 자리를 하얗게 비췄다. 나는 태워야 할 남자의 유품을 그 자리에 모아두었다. 어릴 때 만들었던 모래성 크기만큼의 짐들이 쌓였다. 한 인간의 삼십 년 삶이 이렇게 초라하단 말인가. 나는 그 짐들을 친구처럼 옆에 두었다. 그리곤 군데군데 곰팡이가 핀 누런 벽에 기대 짐 속에서 찾은 몇 장의 편지들을 읽었다. 아마도 사진의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은 듯했다. 그걸 읽으며 나는 곧 메모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떠난 것이 아니다. 여자는 감옥에 가 있었다. 먹이지 못해 사망한 한 살 된 아기를 한 달 넘게 방에 두고 유기한 죄였다. 죽은 아기는 그들의 아이였다. 봄꽃이 피던 시절엔 헤펐을 웃음이 어느덧 가물어버린 두 사람의 겨울에 대해서, 그리고 홀로 남은 남자가 어두컴컴한 방 안에 혼자 누워 바라봤을 빈자리에 대해서 생각하다 나는 다시 한번 숨이 막혔다.
1월 31일 아침 아홉 시. 이 날은 여자의 출소일이었다. 여자를 생각하며 한스럽게 눈을 감았을 남자의 심정만큼이나, 지난 시간 남자의 부재로 시들고 말라갔을 여자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누구라도 가야 한다. 여자가 찾아와 이 텅 빈 방을 발견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서는 뭐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4.
교도소 담벼락 앞에 커다란 토끼가 한 마리 서 있었다. 어른 크기의 이족 보행 토끼. 토끼의 둥그런 발바닥 앞으로 말라붙은 나뭇잎 하나가 주춤주춤 흩날려간다. 뭔가 어색한데... 네 발로 이렇게 앉아있을까. 한참을 토끼처럼 앉아있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표정을 감춰야만 했다. 남자가 당신을 기다리다 혼자 죽어 사라졌다고. 그를 기다리며 긴 형기를 간신히 버텼을 여자한테 대놓고 말할 순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옛 집에 가서 진실과 마주하게 하는 건 더욱 잔인했다.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여자의 삶은 너무 가벼웠다. 당장 끊고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지만 마음이 약한 나는 여자를 보고 멀뚱히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를 준비했고, 그중 하나가 이렇게 토끼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윽고 아홉 시가 되었고. 몇 명의 여자들이 걸어 나와 흩어졌다. 문이 잠시 닫혔다가. 다시 한 명의 여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분명 사진 속의 그 여자였다. 아아... 저 간지 봐라. 여자의 행색은 70년대 거지가 와서 울고 갈 지경이었다. 사진 속의 화사하고 앳된 얼굴은 누렇게 말라붙어 있었다. 얼룩진 카키색 코트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자는 몇 걸음을 걸어 나오더니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눈가에는 곧 쏟아져 내릴 만큼의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곧 울음이 터질 듯 가늘게 떨리는 몸을 보았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젠장할. 소리를 낼 수 없는 토끼는 그저 여자 쪽으로 등을 돌리고 말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5.
여자는 남자가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교도소 앞의 작은 고목나무 의자에 앉아 여자는 하염없이 버스정류장 쪽을 바라보았다. 토끼는 여자가 안쓰러워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등을 대고 옆에 앉았다. 눈이 동그랗고 털이 보송보송해서 귀엽기 짝이 없는, 하지만 덩치가 산만한 토끼가 자길 쳐다보고 앉자 여자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 미친 토끼는 뭐야?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가 토끼를 쳐다본다. 작은 얼굴 위로 눈물 자국이 볼을 따라 얼어붙어 있었다.
혹시 당신...?
뭔가 더 말이 나오려는 찰나, 토끼가 귀여운 앞발로 여자의 어깨를 톡 쳤다. 때려놓고는 눈도 깜짝 않고 혀를 내밀고 있는 익살맞은 토끼의 얼굴을 보자 여자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입술을 움쩍거리던 여자가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예요. 그러자 토끼가 갑자기 일어나 어설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자는 여전히 무반응. 좋아, 이번엔 필살기다. 한창 알바할 때 우는 아기도 빵빵 터지게 만들었던 바로 그 풍차돌리기! ...헉헉 아이고 허리야.
물끄러미 토끼가 하는 양을 보던 여자가, 피식 웃었다
면 좋았겠지만...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 아니죠?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토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여자가 주저 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과연 미친 토끼군. 딱 이런 표정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날은 여전히 쌀쌀했으며, 때맞춰 교도소 앞을 떠나는 마지막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가 가방을 들고 비척비척 걸어갔다. 토끼가 재빨리 여자를 따라가 가방을 낚아채며 말했다.
경수형 기다리신 거죠? 형이 저 보내셨어요. 오늘 아내분이 나오는데 직접 갈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구요. 외국…에 좀 멀리 일하러 가신다고 했어요. 그래서 편지도 아마 한동안 못 쓰셨을 것 같은데… 그 살던 집 있잖아요? 거기도 진작에 정리해서 거처가 없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잠시 임시 거주시설에 가서 기다리시면 연락하겠다고, 말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 저는 예전에 옆에 살던 이웃이에요. 혹시 저 기억나세요? 저는 그쪽 바로 알아봤는데… 아… 토끼는 제가 알바 끝나자마자 와가지고…. 버스 저기 오네요. 가요.
며칠 전부터 되뇌던 말을 단숨에 쏟아냈다. 안 어색했을까? 토끼가 뭉특한 손을 비비적대자 인형옷 틈으로 누런 쪽지 하나가 나왔다. 여자의 출소일자가 적힌 쪽지였다. 아…이거, 형이 준거예요. 하하. 쪽지를 받아든 여자의 얼굴 위로 복잡한 표정들이 구름처럼 흘러갔다. 여자의 경계심도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버스에는 토끼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던 여성 출소자 지원 시설의 수녀님 두 분이 타고 있었다. 안심한 토끼는 주춤하고 있는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라고. 토끼 입장에서도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건넨 손짓이었다.
한 페이지 소설. 습작 0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