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치백>을 보고 나서 쓰다.
2023년 일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을 읽었다.
세상의 넓이에 비춰보면 내가 보고 듣는 것은 아주아주 적다. 내가 문학을 필요로 하는 것은 협소한 내 입장에서는 닿을 수 없는 다양한 주변부의 세상을 살펴보고 마음에 담아두고자 함이다. 일종의 다양성 학습이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논픽션과 달리, 문학은 그런 다양한 입장들에 가슴으로 닿게 해준다.
<헌치백>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독서였다. 올해 이것보다 더 멋진 문학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본에서 높은 권위가 있는 아쿠타가와상이 이 작품에 주어진 것도 비슷한 이유이리라.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작가 이치카와 사오는 어릴 때부터 척추 장애를 앓았다. 학교도 그만둔 뒤 휠체어와 호흡기에 의지해 살아왔다.
사람들은 장애 여성을 '여자'가 아닌 장애인으로만 바라본다. 성(sex)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장애여성으로서 작가는 <헌치백>의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 태아를 잉태한 뒤에 살해하고 싶다는 도발적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무엇이든 ‘욕망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호소한다. 중증 장애 여성 당사자 작가가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의 인간 선언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 지금 다시 옮겨 쓰면서도 얼얼한 느낌이 든다.
… 부모님과 돈의 보호를 받아온 나는 부자유한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사회에 나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도, 피부도, 점막도 타자와의 마찰을 경험한 적이 없다.
정결한 인생을 자학하는 대신에 쏟아낸, 얼핏 떠오른 희망사항이 마음에 들어서 고정 트윗으로 쓰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돈으로 마찰에서 멀어진 여자에서, 마찰로 돈을 버는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51쪽)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간 다양하다고 생각하며 봐온 여러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조차 한편으로는 얼마나 정상성의 범위 안에 갇혀 있었나 싶다. 흔한 이야기들에서 비가시화된 얼마나 많은 약자들이 있었는지도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마찰과 열반
마음으로도, 피부로도, 심지어 성기의 점막으로도 마찰하며 세상을 체험할 수 없었던 이치카와 사오는 어떻게 이 정도의 작품을 써낼 수 있었을까. 자전적 에세이 같은 이 소설을 덮고 나면 작가가 보냈을 인고의 시간이 느껴진다.
10살에 '열반'에 든 이후 (장애 때문에 누워만 있으면서 모든 욕망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성의 존재가 된 상태를 작가는 열반이라고 표현한다) 30년간 작가는 읽고 쓰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일기는 하루이틀 쓰다가 말았는데 소설은 어쨌든 마감을 지키면서 꾸준히 쓰게 되었다고 한다.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을 머리 위에 떠올려 모험하는 느낌이었을까? 이유야 어쨌든, 작가는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도달한 깊이와, 본인의 장애 당사자성을 화학적으로 결합시켜 <헌치백>이라는 작품을 빚어냈다.
정지아 작가가 부모 세대부터 이어져온 빨치산 이야기로 이름을 얻었듯,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작가 델리아 오언스가 평생을 연구하며 바친 늪지 이야기로 깊이와 독특함을 획득하듯, 명작은 그 사람의 개성/당사자성이 긴 삶의 현장에서의 훈련을 거쳐 탄생하는 것이다. 이치카와 사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