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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Jun 29. 2024

나의 문어 선생님 | 무기력을 밀어내는 중력

보고 나서 쓰다.


<나의 문어 선생님>은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소수의 사람들에겐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에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웬만한 영화보다 깊은 몰입감과 감동을 줄만한 웰메이드 다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펄스만의 다시마숲에서 감독 크레이그 포스터와 문어


문어와 친구가 된 감독


이 작품은 감독인 크레이그 포스터(Craig Foster)가 직접 겪은 일을 찍은 작품이다. 무려 1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긴 시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큐멘터리와 영화 작업을 해온 감독은 문득 자신 안에 뭔가를 더 만들어낼 에너지가 바닥났음을 느낀다. 완전히 번아웃 상태였던 감독은 자신이 유년기 뛰놀던 집 앞의 바다를 떠올린다. 결국 귀향을 선택한 그는 집앞 바다 속 다시마숲을 부유하며 매일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작은 문어 한 마리를 만난다. 무리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문어였다. 그 문어는 생존을 위해 주변의 지형지물을 절묘하게 이용하고, 상어 떼의 습격을 받은 뒤 몸의 한 부분을 포기하기도 한다. 감독은 매일 문어를 찾아가 관찰하고 기록하며 문어와 친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문어가 자신을 인식하고 다가오기 시작한다. 감독은 문어에게 애착과 우정을 느끼며 깊은 치유의 경험을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펄스만의 풍경.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가장 남쪽 지역에 있다.


문어 치유


문어와 인간이 서로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모습이 왜 먼 곳에 있는 나에게 힐링의 느낌을 줄까? 그걸 생각해 보다가 이 글을 쓰게 됐다.


한때 좀 우울해하거나 뒤처지는 사람을 보면 나약하다고 평가절하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멘토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우울감은 단지 호르몬의 화학적 불균형이나 뇌신경학적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와 같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알약 한두 개로 우울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인류가 가장 많이 처방받는 약 중 하나가 항우울제이고 약장사들은 거대한 매출을 내는데, 여전히 인류는 끈질긴 우울증에 시달린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문어 선생님>은 단순하지만 정확한 단서를 준다. 화학적 불균형이 문제가 아니라 삶의 불균형이 문제라는 것이다.


종의 기원을 따져보면 현생 인류라는 호모 사피엔스는 35만 년 전쯤 나타났다고 한다. 이 종이 경제적 생존을 위해 자연과 마을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 년 사이의 일이다. 하루로 치면 자정이 되기 25초 전쯤 갑자기 다른 장소로 워프한 셈이다.


그렇게 엉뚱한 장소에서, 심지어 혼자서 다음날을 맞은 인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연 속에서, 무리와 함께 지내며 안정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생명체다. 정신이 온전할 수 있을까? 경제적 기회가 도시에 집중되면서 자연은 지워지고 주변의 이웃과 공동체는 사라졌다. 게다가 인스타나 드라마, 영화 속 화려한 삶들에 비해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을 매 순간 느끼는 인간이 - 고독감, 소외감, 분리감, 세상 어느 것도 움켜쥐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감으로 비틀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뇌라는 기계가 고장나서 우울한 게 아니라 사람이라서 힘든 것이다.


DALL·E3로 그린 삽화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에리히 프롬의 책들에서 가장 강렬했던 하나의 문장을 고르자면 “분리는 가장 격렬한 불안의 근원”이라는 말이었다. 거의 모든 인류의 역사는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동력에서 시작되었다고 에리히 프롬은 분석한다. 인류가 원래 소속되어 있던 마더-네이처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을 어떻게 불안하게 만들고 소진시키는지, 또한 우리가 다시 그 품에 안겼을 때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를 <나의 문어 선생님>은 극적인 실화를 통해 보여준다.


우리가 당장 문어 혹은 안되면 오징어라도 찾아 동해 바다에 뛰어들 수는 없겠지만. 우울하고 지쳐있고, 무언가를 해낼 의지력이 바닥나서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꼭 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싶다. 우울이나 무기력 같은 현대적 삶의 부산물은 증발시키고, 자연의 중심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중력을 느끼게 해 준다면 집 앞 잡초와의 관계라도 좋다. 살아있는 모든 것과의 단단한 연결은 살아있어서 휘청거리는 시간을 줄여줄 수 있다. ☀︎




주말에 뭐 볼까?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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