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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Aug 03. 2024

무당을 믿을 수 있냐는 질문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샤먼 : 귀신전>을 보고 나서 쓰다.


얼마 전 tving에서 다큐멘터리 <샤먼 : 귀신전>을 공개했다.




잠든 남자친구의 몸 위에 올라타서 성행위하듯 몸을 흔드는 처녀귀신을 보는 여자가 있다. 남자친구는 그런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잠들어있다.


고민 끝에 무당을 부르는데, 무당이 말해주는 그 처녀귀신이 나타난 이유가 자못 충격적이다. 이후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 어떤 픽션도 도달할 수 없는 전개다.


이 다큐는 2022 ~ 2023년에 걸친 긴 시간 동안 전국의 무속인과 의뢰인들로부터 수집한 살아있는 사례로 꽉 차있다. 이야기의 새로움과 몰입감으로 보면 올해 본 다큐 중에 손꼽힐 정도다.


프리젠터 옥자연, 유지태 배우는 실제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굿을 지켜본다. 종종 작위적인 연출이 있지만 배우들의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장면을 살린다.


무속의 지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기에 여전히 음지에 머물러있는 우리의 전통문화 무속.


천만 영화 <파묘>의 주요 소재였고, 대선 토론회에 나온 대통령도 손에 王자를 새기고 나오는 판에 무속이 여전히 터부시된다는 것이 무당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와 무속을 놓고 생각해 보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들을 중심에 두고 그에 얽힌 죄와 벌, 내세의 이야기를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일종의 신념 체계이고 각자가 가진 세계관이다.


기독교 사제들은 신의 실존을 입증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몽상가나 이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폄하당하진 않는다. 과학적 진실이 뭐든 간에, 일단 그들은 엄청 다수이고 교회 공동체는 타자화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속에 대해서는 다르다.


어떤 사람이 무병을 앓고 신내림을 받아 무속인이 되었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나, 어떤 인간이 느끼는 알 수 없는 고통을 ‘영가(靈駕, 무속 혹은 무속과 결합한 전통 불교에서 영혼을 지칭하는 말)’의 존재로 설명하는 무속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그것을 망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샤먼>의 한 장면


과학적으로
의미있는가?


굿을 하는 무속인이 생고기를 물어뜯고 작두 위에서 방방 뛰는 광경을 보면 저것이 대중적 생활의 일부가 되는 건 좀 어렵겠지 싶긴 하다. 점잖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품위 있게 지켜보고 올 수 있는 의례였다면 무속인들도 순복음교회 같은 커다란 사당을 여의도에 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전국에서 이상한 일만 찾아다니는 직업을 가져서일지는 몰라도) 퍼포먼스의 특이함이라면 만만치 않은 기독교인도 많다. 흔한 ‘방언’만 하더라도 입문자가 보기에는 뜨악한 구석이 있고, 수만 명의 신도를 몰고 다니는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외계 감성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작년 가을 어느 날에는 유명 전도사가


“하나님! 좋은 세포로 충만하게 하소서! 면역력으로 충만해질 지어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수치가 3천 이상으로 회복될지어다!”


라는 기도를 목놓아 외치는 현장에 있었던 적이 있다. 풍선인형처럼 리듬에 따라 몸을 흔드는 열광적인 100여 명의 신도와 함께였다. 생고기를 뜯는 것 못잖게 내겐 그런 장면도 충격이었다.


미드저니로 그린 삽화


양쪽과 얽힌 사건들을 취재하며 나는 결국 이런 종교적 문화들이 과학적으로 의미있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내 아이가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음주 운전자의 자동차에 치여 죽었을 때, 배우자와 같이 셀카를 찍은 뒤 사진을 넘기다 우연히 외도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아기의 어떤 특이한 행동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뇌 장애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 때,


과학은 이런 고통이 왜, 하필, 내게 찾아왔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고통을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질병을 치료하듯 고통을 잘게 부수어서 약화시킨 뒤 곱씹을 수 있어야 하는데, 위와 같은 인간사의 고통은 부수어지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다.



이럴 때 종교적 믿음은 거의 인간을 구원한다.


이 그것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의 <욥기>에서 착한 욥은 끔찍한 고통을 겪는데 그건 (나쁘게 말하면) 신이 사탄한테 장난 한번 쳐보라고 허락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니 모든 것이 나중에 두 배로 멋지게 회복된다.


욥기를 누가 썼을지는 몰라도 작가의 의도를 추정해 보면 (1) 인간의 고통은 신의 뜻이다, 즉 너는 모르는 이유가 있다 (2) 희망을 버리지 마라, 두 가지일 것이다. 이 두 가지 믿음은 고통에 빠진 인간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소중한 심리적 지지선이 될 수 있다.


한국을 40여 년 연구한 인류학자 로렐 켄달(전 미국 컬럼비아대 인류학과 교수)도 이 다큐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귀신이 실존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속이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가? 쓸모가 있는가?가 의미 있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귀신을 믿나요? 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로렐 켄달 교수


모든 무속인은
믿을 만 한가?


마지막으로 습관적인 공자왈 맹자왈 하나만 하자면... 이 다큐에는 짚고 넘어갈 문제가 하나 있다. 위에 얘기한 로렐 켄달 교수를 이 다큐가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가 이 다큐의 문제를 보여준다.


3년쯤 전에 무속인이 얽힌 사망사건을 취재하며 무속에 대해 공부하다가 이 분의 연구 내용을 처음 접하게 됐다.


로렐 켄달은 한국에 대한 애정과 오랜 인류학적 관찰,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결합해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낸 학자다. 2006년 신동아에서 이분을 인터뷰한 기사는 여러모로 무속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관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준다.


하지만 이 다큐는 로렐 켄달을 아주 가볍게 활용한다. 다른 전문가들처럼 이야기의 안내자 수준으로 쓴다.


이런 태도는 명확하게, 이 다큐의 목적이 무속이라는 사회 현상의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적 재미를 주는 데 있음을 선언하는 듯하다. 의미는 있지만 호흡감을 떨어뜨리는 전문가의 통찰은 과감히 생략하겠다는 것이다. 멋있는 척 안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신이다>를 비롯해 OTT 베이스의 한국산 다큐멘터리가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인 것 같기도 한데, 무조건 재미, 흥행, 수익을 추구하는 이런 태도가 조금 위험하게 느껴진다.


<샤먼>을 보면 이미 제작진이 무속을 완전히 믿고 있다. 무속인과 제작진 사이에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가 관찰자가 아니라 굿판의 일원이 되어있는 느낌이다.


몰입감 있는 <샤먼> 여덟 편을 쭉 빠져들어서 보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생기는 고통이나 알 수 없는 사건들을 영의 움직임으로 과하게 해석할 여지가 분명히 있다. 사소한 악몽을 꾸거나 바람이 불어 창문이 쿵쾅거려도 ‘혹시..?’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밌게 보고 말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 고통의 원인을 원귀나 지박령에게서 찾을지도 모른다.


대중문화가 관심을 갖는 만큼 무속 시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무속인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신을 빙자해서 사기를 치는 일도 흔해졌다. 내가 그알에서 취재했던 청양 모녀사망 사건도 돈에 눈먼 무속인의 사기가 원인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무속인이 원인이 된 사망 사건을 여럿 다뤄왔다.


무속인중에는 이렇게 돈벌이에 눈이 먼 사람도 일부 있고, 의뢰인의 고통을 나누며 치유의 의례를 주관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제도 있을 것이다.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 있을 텐데 이 다큐는 후자에만 조명을 비추니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거리두기가 잘 되는 분들께만 추천.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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