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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May 11. 2023

어리석고 미욱한 나의 파프리카 소스

 대학교 전공수업 중 그렇게 학점을 잘 받으려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B-를 받은 수업이 기억난다. 비 마이너스. 누군가에겐 참 초라해보일 결과지만 나는 그 수업 때 정말 죽기살기로 공부했었다. 최악의 결과가 나올까봐, 왠지 이 결과가 안좋게 나오면 당장 옆에 있는 사람이 "당신은 이 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할까봐 자격지심에. 거의 텍스트 내용은 다 외웠었다. 그럼에도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은 그저 다른사람들이 더 죽기살기로 했었을 뿐이고, 더 나아가면 내가 이쪽 분야에 다소 잼병이었던 것 때문이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겨우 이정도밖에?" 라는 말이 나올 결과가 나온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인생에서 어느순간부터 그림자마냥 늘 따라다녔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 다소 강도높은 자체장학사 시스템을 도입했다. 지금의 현재는 별 것 아니고 결과가 잘 나온 것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에 대해선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스스로를 조여맸다. 잘한 건 당연한 것이고, 못한 것은 스스로가 용납하지 않는다. 참 사람심리가 간사하다고, 내가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한 나의 나의 모습과 일상들은 사실 그조차 얻지못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고 불안 안에서 살았던 과거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얻는 순간 그 과거들은 잊어버렸고 당연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나는 B- 받기 전에는 교수님이 설마 D도 주실까 걱정을 했었었다.


 파프리카로 소스만들기는 은근 번거롭다. 불에 태우듯 구워준 다음 껍질을 벗겨내고 한김 식혀 갈아줘야 한다. 그렇게 불에 태우듯이 구우면 극강의 향과 생 파프리카에선 예상 못했던 단맛이 드디어 튀어 나온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스테이크를 찍어먹는 등의 용도로 써먹을 소스 맛을 내려면 다른 재료가 필요하다. 로메스코 소스를 만들 기세로 오일과 마늘과 견과류까진 넣지 않는대도, 하다못해 올리브오일과 소금만이라도 넣어줘야 어리고 미숙한 단맛을 넘어선 맛이 난다. 나는 그것을 몰랐기에 처음 만들었을 땐 그 너무나도 원색적인 맛에 당황했다. 이 맛 때문에 내가 그렇게 불을 썼나? 이럴바에야..?라는 대목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그 어느 순간도 쉽게 넘어간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다 통용되는 말일것이다.  슬프게도 우리 가여운 인류는 남의 고통과 실패에 있어 상세한 마일리지를 모두 돌봐줄만한 여력도 능력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의 한계다. 그렇게 생산되는 막말과 겉핥기식 평가에 나 스스로부터 주눅들어 중심을 잃고, 결국 가장 마지막까지 그러지 말아야할 나조차 스스로를 그렇게 보는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불타버린 눈물이 담겨있었는지 망각한 채.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해낸 나를 칭찬해주라는 말. 스스로를 아껴주라는 의미인지는 알지만 나같은 냉소주의에 절은 사람에게는 반감에 마음깊이 들리지 않는 말이다. “그럼 나는 큰 걸 바라면 안되니 작은 것에나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가 아닌걸 알면서도 그 생각부터 들었다. 당장 내가 지금 힘든 것은 내가 바라는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해 얻는 좌절감과 비참함 때문인데, 내게는 지금 빈 공간만이 보일 뿐인데 채워진 이 작은 게딱지에서부터 시작하자는 말이 귀에 쉬이 곱게 들어올까. 저 말은 당장 지금의 번뇌를 지워주지는 못했다. 나는 큰 것에 도달해야 했고,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꼭 지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큰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현실적으로 얼마나 걸릴지, 내가 얼마나 앞으로 힘들지를 가늠해야 했다. 그 기준은 내 과거 내역들에 달려있다. 막연한 이럴것이다 - 라는 추측이 아니라, 과거에 나는 어땠는지를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를 봐야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위해서는 어리석어 보이는 작은 것들을 쌓아온 나의 수고와 눈물들을 돌이켜 봐줘야 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당연해보이고 작아보이는 것 하나하나를 쌓는데 든 번뇌와 수고를 내가 봐주고 인지해야, 지금 쌓을 작업들에 있어 올 고통들을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연한 이상 속의 내가 아닌, 현실기반의 과거의 나를 인지하고 인정해줘야 앞으로 오랜시간이 걸릴 여정을 좌초되지 않고 진행할 수 있을것이다. 작은 것이지만 그걸 해낸 나를 칭찬해주라는 말에 대한 냉소주의자의 해석본은 이렇다.


 나의 파프리카 소스는 그때의 나처럼 어리석고 미욱했다. 그러나 기억해야 했다. 내가 걸어온 그 길에서 그 어떤 것도 쉽게 그냥 얻어진 것은 없었음을. 아무리 단순하고 미련해보이는, 보잘것없는 결과물조차 불태운 마음과 시간을 갈아내서 간신히 만들어낸 것이었음을. 남들이 잊어도 나만큼은 잊지 않아야 했다. 과거에 미욱했고 지금도 그런, 무력한 나를 존중해주어야 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모자랄 것이기에, 지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같이 들으며 읽으면 좋은 곡)


-chairlift때부터 꿋꿋하게 걸어온 길 사이에 드디어 올해의 역작을 만들어낸 caroline polachek의 butterfly 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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