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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버섯 Aug 09. 2023

지구를 손에 넣다!

 우리 아빠는 생전에 포항제철(그땐 포스코라 안 했다)에 다니셨고, 우리 가족은 포항제철 사원 아파트 같은 곳에 살았다. 아파트는 13평이었고 연탄보일러를 때웠다.


 평수를 기억하는 것은 엄마가   "우리는 열세 평에 살아서~~ 열세 평~~ 열세 평~~" 하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빠를 구박하는 투는 아니었지만 신세 한탄조의 타령 같은 것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꽤 커서 비슷하게 사는 사람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다 우리랑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처음 알았다. 커다란 집도 있다는 것을! 친구네 집에는 친구방도 있었고, 거실에 레이스가 덮인 티테이블도 있었다. 식탁이 있는 주방이 따로 있어서 우리 가족 처럼 안방에서  개다리소반에 모여 앉아 한 프라이팬에 온 가족이 숟가락을 집어 넣고 볶음밥을 먹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친구네 집에 가서 제일 놀랐던 점은, 커다란 지구본이 방에 있었던 것이다. 지구본이 얼마나 큰 지 나라의 이름뿐 아니라 수도도 적혀 있었다. 지구본을 한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너무 크고 반짝거려서 유리로 만든 것인가 싶어서(?) 손도 대보지 못하고 집에 왔다. 나랑 가장 친했던 그 친구는 교육 목적으로 6학년 2학기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이 아파트로 이사 가는 스토리가 꽤 긴데, 그전에 살던 사원아파트의 재개발로 인해 새 아파트로의 이사가 가능했다. 당시 포스코에서는 사원 아파트의 재개발을 계속 미루고 있었고, 참다못한 우리 동네 아줌마들이 날마다 날마다 포스코 앞에서 농성을 한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우리 동네 아줌마들은 농성을 엄청 잘했다. 나중에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퇴임을 할 때도 아줌마들이 다 같이 몰려가서 퇴임 반대 농성을 했다. 그래도 박태준 회장이 잘했는데 간다며 아줌마들이 포항제철 본사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다 같이 꺼이꺼이 울었다. 아무튼 우리 동네 아줌마들의 화력은 장난이 아니었고 재개발을 얻어낼 만큼 강력했다는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사 간 아파트는 엄청 컸다. 33평이나 되었다. 13평에 살던 가족이 33평에 가니 집이 쩌렁쩌렁 울렸다. 집이 너무 커진 게 무서웠던 나머지 난 적응을 못하고 매일같이 악몽을 꿨다. 결국 초등학생 남동생이 내 침대 아래서 6개월을 이불을 깔아놓고 지냈다. 자기는 태권도를 배워서 용감해서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고, 난 그 초딩을 믿고 서서히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큰 집에 이사를 갔으니 지구본을 사달라고 했다. 난 온 세계를 누리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사 온 지구본은 쪼끄만한 플라스틱이었다. 친구집에서 본 번쩍이는 커~다란 지구본을 갖고 싶었는데... 그건 당시에 10만 원이나 해서 안된다고 했다.


 10만 원??!!!!!  10만 원이면 안 되는 거다. 플라스틱 지구본에 정을 붙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금세 글씨도 지워지고 수도도 글씨가 너무 쪼끄만 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 플라스틱 지구본은 굴러다니다가 어느 날 재활용통에 처박혀버렸다.


 한참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코스트코라는 돈 내고 들어가야 하는 마트에 가게 되었다. 그 당시 35000원 정도의 회원비는 아깝지 않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코스트코에 갔는데 저~ 멀리서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토록 갖고 싶었던 커다란 지구본이었다. 엄청 크고 반짝거렸다. 가격도 35000원이었다. 이상했다. 내가 어릴 적 10만 원이던 것이 지금은 35000원이 되어있었다.


 당장 사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놓을 곳이 없었다.

 커다란 지구본을 머리에 이고 살 순 없다. 덮고 잘 수도 없다. 창고에 넣어두려면 안 사는 것이 낫다. 어릴 때는 커다란 지구본을 사려면 10만 원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어른이 되어서 알았다. 지구본을 사려면 지구본을 놓을 만한 집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커다란 지구본을 눈앞에 두고도, 지구본 정도는 살 수 있는 돈도 있었지만 난 지구본을 살 수 없었다.


 코스트코에 갈 때마다 지구본은 여전히 있었다. 갈 때마다 지구본을 한 번씩 만져보았다. 꼭 사고 싶은 마음은 많이 사라졌지만 지구본은 내 어릴 적 꿈만 같았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지켜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어제 잡곡을 사러 코스트코에 갔다. 남편하고 딸하고 무심하게 이것저것 담다가 갑자기 지구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야!!!" 마음속에 초록불이 켜졌다.  


 얼마 전에 이사를 왔다. 남편과 함께 셀프로 인테리어도 하고 아이들 방도 꾸몄다. 아이들이 이제 초등학생, 유치원이 되어 지도 같은 것에 관심도 가진다. 살 수 있다! 아니 사도 된다! 사야 하는 이유가 차고 넘친다!! 남편에게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며 지구본을 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니(우리는 생필품이 아닌 것을 살 때에는 반드시 회의를 거친다. ) 남편도 안 그래도 지구본은 예전부터 하나 사야겠다 생각을 했다며, 딸에게 "지구본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하나 골라~!" 한다. 어차피 다 똑같은 지구본인데 딸이 엄청 심사숙고해서 박스를 골랐다.  "이 지구본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집에 와서 거실에 지구본을 두었다. 엄청 크고 위도, 경도도 나온다. 반짝반짝해서 꼭 도자기로 만든 것 같다. 심지어 야광 기능도 있다! 코드를 꽂으면 조명이 비추어 밤의 야경 같은 세계지도가 나온다.

 밤에 거실에서 빨래를 개며 가만히 지구본을 보는데 갑자기 아빠랑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막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지금 울면 진짜 거지같이 울 것 같은데 눈이 벌써 빨개졌다.


"엄마! 아빠! 나 커다란 지구본 샀어! 세상에서 제일 큰 지구본 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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