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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버섯 Oct 03. 2023

이건 비밀인데 우린 가족이야

고레헤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즐겨 본다.

그의 영화 중 정수는 '어느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쇼타와 오사무는 어느 날처럼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고 집에 들어간다. 들어가는 길 부모로부터 학대받으며 살던 유리를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집에 데리고 가 자식처럼 키우게 된다.
집에 가면 하츠에 할머니와,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노부요, 유흥업소에서 사는 아키가 있다. 이 가족은 유리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을 택한다.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했다는 유리를 위해 다 함께 바다에 가서 해변에서 즐거이 노는 모습은 어느 단란한 가정과 다를 바 없었다.
바다에 다녀온 후 하츠에는 잠에 들어 깨어나지 못한다. 하츠에의 연금이 필요했던 가족들은 하츠에를 암매장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한다.
다시 도둑질을 하며 생활하다가 쇼타는 다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실종된 유리를 데리고 있다는 것도 들키게 된다. 모두는 경찰조사를 받고 유리는 친부모에게, 쇼타는 새로운 가정을 찾아 입양되는 것으로 결정이 난다.
유리는 집으로 돌려보내져 다시 친부모에게 학대받는 일상을 받게 된다. 멍이 든 유리가 아파트 복도에서 하츠에 일가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며 밖을 보며 영화는 끝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연히 가족이 되어버린 이야기, 이 영화가 머릿속에 계속 떠오른 이야기는 며칠 전이 추석이었기 때문이다.




년 전 나는 시아버지와 가족으로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이런저런 일들로 상처를 받아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내 할 도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버이날엔 전화를 하고, 생신날엔 축하를 드리고 묻는 말엔 대답을 하고... 하지만 그뿐이었다.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하는 것. 그것은 아버님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기보다는 나와 함께 사는 남편에 대한 예의였다.


이번 추석에는 아버님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긴 연휴에 시누이들이 본가에 내려오니 친정에는 가지 말고 시댁에서 다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제안이 아닌 '명령'을 하셨다. 남편은 완곡하게 거절을 하였고, 다시금 나에게 걸려온 전화에 나는 전혀 완곡하지 않게 거절을 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며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닌 '너네 엄마 집에'라는 표현을 곁들인 일방정인 통보가 문제였다.


연휴 어느 날 아침 아버님은 사위와 아들, 딸, 손주, 손녀가 함께 있는 아침 식탁에서 전을 찍어드실 간장이 없다고 "간장! 고추장!"하고 주방을 향해 소리를 치셨다. 안 그래도 간장을 만들고 있는 차였지만, 청유형 어간 어미가 다 빠져 린 허공에 내 꽂은 명령조의 단어의 공격에 썩 기분이 좋질 않았다.


다들 막걸리를 한잔 하며 밥을 먹는 그 시간 나와 어머님은 아침을 차린다고 한순간도 앉아있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것저것 다 차리고 앉아서 두어 숟가락 뜨고 있는데 아버님이 식사를 다 마치셨는지

"여기 따뜻한 물 일분 삼십 초 데워서 갖고 오너라!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는 것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물을 떠 올 생각을 안 하고 뭐 하노!"라고 하셨다.


부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채 수저를 놓고 적정한 온도의 물을 아버님께 갖다 드렸는데 아버님은 언짢은 표형으로 또 나에게 소리를 지르셨다.


"왜 내 물만 갖고 오노! 시아주버님 물이랑, 남편 물도 데워서 갖고 와야지. 주부가 눈치 있게 어른들 밥 먹는 거 살피다가 다 드신 것 같으면 물을 갖고 와야 니 의무 아이가? 네가 식당에서 일을 하면 정신을 차리고 물을 다 떠다 줘야 할 거 아니야!"


분노의 게이지는 한계선을 넘어버렸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말씀 좀 드릴게요. 아까 아버님께서 고추장! 간장! 말씀하실 때 저 정말 서운했어요. 필요하다고 하시면 갖다 드릴 수 있죠, 하지만 그렇게 명령조로 말씀하시면 저 정말 속상해요.


물도 필요하시면 떠다 드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도 여태 서있다가 이제야 한술 뜨려고 막 앉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분이 좋질 않네요. 저도 밥 한 끼는 편안하게 먹고 싶으니까요.


덧붙여 백번 양보해서 아버님 물 정도는 떠드릴 수 있는데 아주머님과 오빠는 물 정도는 스스로 떠드셨으면 좋겠어요. 6살 난 아이들도 스스로 물을 마시는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아버님은 식당의 의무 어쩌고를 반복하셨고... 난,


"아버님, 자꾸 식당식당 하시는데 저 이 집 종업원 아닙니다. 기분이 정말 나쁘네요!"라고 말했다.


보다 못한 남편과 시누이는 아버님께 어서 사과하라고 잘못했으면 인정을 하면 되지 왜 그러시냐며 내 편을 들었고, 계속 본인 말이 맞다고 우기던 아버님은 벌게진 얼굴로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남편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얼굴을 살피다가 아버님이 잘못했다며 내 편을 들다가를 반복했다. 그래도 다들 내 편을 들어주니 속상하지 않았다. 쇼미 더머니 래퍼처럼 아버님께 할 말을 다 했더니 속도 시원했다.


밥을 먹고 있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식탁 쪽으로 걸어오셨다.

문득.... 아버님이 내 뒤통수를 갑자기 때리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에 뒷 목에 힘이 들어갔다...


식탁을 향해 걸어오신 아버님은 조용히 본인이 드신 빈 그릇과 수저와 물컵을 싱크대에 갖다 놓으셨다. 맨날 누군가에게 시키던 커피도 스스로 타고 계셨다. 커피를 들고 나가시는 듯 하더니 이상한 소주병을 갖고 식탁 주위를 오실 듯 마실 듯 어슬렁어슬렁 하시더니 갑자기 말씀을 시작 하셨다.


"니 이거 갖고 갈래? 이거 내가 직접 담근 청포도 식촌데..... 식초가 몸에 좋다. 이건 천연이다 천연."


"네 주세요. 요즘 그런 식초 구하기 힘들거든요.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식초를 내 자리 가까이 슬쩍 두고 재빨리 나가시는 아버님 등을 보자니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알았어요 아버님. 미안한 마음 알겠으니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미안하다고도 말 못 하고, 성격을 죽이고 살지도 못하는 70대 후반의 아버님은 나에게 사과의 의미로 직접 담근 식초를 건네는 것을 선택하셨겠지.


사위랑 아들 앞에서 남자다운(?) 모습 한번 보여주려고 큰소리 내셨다가 며느리한테 한소리 듣고 아들 딸의 지원 폭격을 받은 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는데 그냥 웃음이 났다.


그때, 고레헤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떠오른 것은 이 대사 때문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우린 가족이야."




사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아버님과 나는 어쩌다 보니 어느 날 가족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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