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두 달이 흘러갔다.
수업이 늘었다. 매일매일 저녁에 출근하는 것은 사람을 깊은 우울에 빠지게 하는 일이었다.
퇴근하는 이들이 많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에 내려 퇴근길 라디오를 들으며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의지가 있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재미있어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는 않다.
의지 없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자, 시험범위가 이만큼이니 성적 좀 올려주세요'라는 식으로 나를 대하는 아이를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너무 화가 나서 집에 오는 길 어묵을 먹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고 어묵을 하나 먹으면 그나마 화가 가라앉았다. 아니,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잘하는 아이들만 가르칠 수는 없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만 가르칠 수도 없다.
하지만 의지는 없고 허세만 있는 아이의 성적을 올려주는 것은 무언가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족집게처럼 콕콕 찍어서 성적을 올려준 이아이에게 나는 영어를 가르친 것일까.
세상을 요령껏 사는 방법을 가르친 것일까.
100점짜리 시험지를 내 앞에서 자랑스레 흔들어대더니 집에서 인강을 보며 공부하다 시험을 망쳤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신이 난 아이를 보며 자괴감이 들었다.
"모두가 너처럼 과외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넌 참 운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해"라고 말하고 집으로 왔다.
몸살로 며칠 쉬니 참 좋았다.
내 아이들과 살을 부대끼며 밤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드는 것은 삶의 정수였다.
어느 대통령후보가 말했던 '저녁이 있는 삶'
여전히 참 훌륭하고 멋진 말이다.
그래서 몇몇의 아이는 그동안 맡았던 수업을 고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아이들과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무엇보다 나와 함께 수업을 해서 성장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나를 요령으로, 수단을 삼는 아이와는 이제 그만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이 허무하지 않을지. 쓸쓸하진 않을지.
하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결정해야 내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