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마음의 거리

공감

by 치아쌤 CHIA ssam



오늘 진료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예약 환자들이 시간에 맞춰 들어오고 나가는 가운데,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민지(가명)의 어머니였습니다.


"선생님, 죄송한데... 민지가 또 장치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오늘은... 아이가 울었어요."


전화기 너머로 전해진 이 말에 제 가슴이 무거워졌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민지는 철사교정 중인데, 끝의 어금니 장치가 자주 떨어지는 문제로 최근 몇 주간 여러 번 내원했습니다. 장치도, 접착제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민지는 밤에 이를 갈았고, 그 힘으로 장치가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왜 울었는지 말씀해 주셨나요?"


"치과에 자꾸 가기가 싫대요. 눈치가 보인다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 속에서 무언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치과에서는 오히려 민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응급으로 오는 환자들은 예약 시스템 상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기다림이 민지에게는 '내가 폐를 끼치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갔을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시선들


치과 의사로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많은 환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통증, 불편함, 두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지만, 민지의 사례는 저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진료실의 풍경이, 환자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요.


마우스피스가 해결책이었지만, 민지의 가정 형편상 그 비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어머니는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하셨고, 저희도 그 결정을 존중했습니다. 하지만 그 '버티는' 과정에서 민지가 느꼈을 심리적 부담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료실에서 저희는 민지를 보며 "또 장치가 떨어졌네, 음식먹을때 조금 조심하고, 이를 꽉 깨무는 습관을 좀 의식하면 좋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민지의 귀에는 그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어쩌면 "또 왔어? 귀찮게..."라는 숨겨진 메시지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진료 과정이, 환자에게는 '부담스러운' 경험일 수 있다는 사실. 특히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더욱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다리 놓기


다음날 , 내원한 민지에게 저는 먼저 반갑게 인사하고,


"민지야! 어제 장치 떨어진 거 때문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고 들었어."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민지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자주 장치가 떨어져서 죄송해요. 제가 밤에 이를 갈아서 그런 건데..."


"아니야, 민지야. 오히려 우리가 너에게 미안해. 응급으로 오는 경우에 기다리게 해서. 네가 우리에게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어. 이게 다 치료 과정의 일부야. 우리는 네가 건강하게 교정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 일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자연스러운 거야."


잠시 민지는 침묵했지만 곧 작은 미소를 지으며,


"...정말요?"


"물론이지. 그리고 다음에 올 땐 미리 연락을 줘. 우리가 시간을 맞춰서 너를 더 편하게 볼 수 있게 할게."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일


민지의 사례는 저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때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 환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 환자들은 자신의 불편함이나 부담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들은 종종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불안과 걱정을 읽어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민지의 어머니는 경제적인 이유로 마우스피스 대신 '조금만 더 버티기'를 선택하셨지만, 저희는 그 '버티는' 과정에서도 민지가 정서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의료인으로서 저희는 질병뿐만 아니라 환자의 마음도 치료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더 중요한 치료일 수 있습니다. 특히 반복적으로 내원해야 하는 환자들에게는, 그들이 느끼는 미안함과 부담감을 덜어주는 것이 저희의 역할입니다.


작은 변화, 큰 차이


민지의 이야기 이후, 저는 진료실에 작은 변화를 주기로 했습니다. 응급 환자들을 위한 짧은 '골든 타임'을 만들고, 특히 반복적으로 내원하는 청소년 환자들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공감을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모든 스태프들과 함께 '환자의 시선'에서 우리의 진료 환경을 다시 점검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저희가 표현하는 작은 말투나 행동이 환자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공유했습니다.


민지는 이제 예약 없이 와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희는 그녀가 편안하게 내원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민지의 표정을 밝게 만들었고, 그녀의 협조도 좋아졌습니다.


공감의 힘


의료 현장에서 '공감'은 때로 약보다 더 강력한 치료제가 될 수 있습니다. 환자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리적 불편함까지 이해하고 배려할 때, 저희는 진정한 의미의 '치료'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민지의 이야기는 저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의 거리'를 인식하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습니다.


때로는 저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환자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담을 알아차리고 배려하는 작은 노력이, 환자에게는 큰 위로와 안정이 된다는 것을요.


오늘도 저는 진료실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환자들을 맞이합니다. 그들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건강까지 살피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민지처럼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들도 읽어낼 수 있는 따뜻한 의사가 되기 위해, 오늘도 저는 조금 더 귀 기울이고 조금 더 바라보려 노력합니다.


2025년 5월 20일

치아쌤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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