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에세이 [ 그렇게 가면 돼, 지금처럼]

by Eunjoo Doh




여름의 녹음은 점점 짙어간다. 거실 창문 너머 스위트검 나무가 서 있다. 그 잎사귀들은 연두색에서 깊은 초록으로 변해간다. 거리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키가 높다란 미루나무들은 춤추는 일이 잦다. 바람 따라 서걱서걱 온몸에서 여름 소리를 내며 흥겹다. 매주 한 번씩 들르는 동네 야채 가게 옆 채소밭은 온통 초록 물결을 이룬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에 지쳐갈 때쯤 저 멀리서 시원한 물줄기가 보인다. 거대한 스프링클러가 참고래처럼 하얀 분수를 뿜어낸다. 높은 열과 습도에 숨통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그늘진 평상에 앉아 한 입 베어 먹는 수박처럼 시원하게 적셔준다.

초록빛깔이 선명해지는 한여름의 정원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봄이면 여린 줄기들이 조용히 돋아나고 채도가 낮은 녹색잎을 선보인다. 동그란 모양의 잎들은 점점 커져가며 옆과 위로 줄기들을 뻗어간다. 작은 꽃망울이 맺히면 어린 소녀를 만나는 기분이다. 아이보리색 사이로 길쭉한 타원형의 옅은 주황색이 번진다. 마치 볼이 발그스레 물든 듯, 수줍은 미소가 피어난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어느새 덩굴은 키가 커져있고 잎은 얼굴만 해진다. 수줍던 소녀가 성숙한 여인으로 변신한다. 진한 주황색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띠며 쳐다본다. 순간 눈이 부셔 감는다. 서로 감싸 안고 있는 블랙베리들과 포도들은 한련화 덕분에 덩달아 더욱 싱그러워 보인다.


한련화는 최상의 주황색을 지녔음에도 전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시골스러운 정겨움이 묻어난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소박해진다. 가끔씩 교만해지거나 우쭐대고 싶은 날이면 잠시 잠깐 한련화를 쳐다보기도 한다. 누구의 손길도 기다리는 법이 없다. 제아무리 뙤약볕이 아스팔트를 녹이고 잔디들이 모조리 누렇게 타들어가도 개의치 않는다. 물을 달라고 조르지도 않는다. 스스로 모든 것들을 견뎌내며 매일마다 가고 싶은 길을 찾아간다. 꽃이 지고, 씨앗이 맺혀 땅에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매해 살아간다.



그렇게 한련화를 바라보던 시선은 곧 나에게로 멈췄다. 오십 대 초반을 넘어서야 몇십 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 그 길에서 홀로 있는 ‘나’를 마주했다. 풍화된 세월에 닳아버린 모습은 볼품없이 변했다. 탄력을 잃은 얼굴과 몸, 하얀 눈꽃이 내려앉기 시작한 머리카락. 그리고 외모 뒤 깊숙한 곳에 여전히 꽁꽁 숨겨져 있던 원래의 ’ 나‘ 도 보였다. 안도의 숨을 내뱉고는 지체 없이 모든 허물을 던져버리고 나섰다. 실패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타인의 시선과 말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은 채 뻔뻔스러움마저 입고 가야 할 길을 간다.


이른 아침,

정원의 한련화가 말을 건넨다.



“ 그렇게 가면 돼.

지금처럼. ”



나는 잠시 꽃잎의 흔들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말이 여름 바람을 타고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일러스트

by

Eunjoo Doh

매거진의 이전글그림 에세이 [베리들의 비밀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