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에세이 [노란색이 박힌 자리]

by Eunjoo Doh

작년 중순, 일을 그만두었다.

루틴이 무너진 자리에서 하루는 끝없이 흘렀고, 익숙한 질서가 사라진 시간은 낯선 울림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텅 빈 익숙함에 길들기까지는 꽤 오랜 연습이 필요했다. 흩어진 일들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가지들을 하나씩 쳐내고 나서야 비로소 조용히 형태가 드러났다. 이제야 나는 조금 더 선명해진 길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도, 마음 한편에는 아직 덜 닦인 기억 하나가 남아 있다. 몰입의 속도 때문일까, 일주일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어느덧 한 달, 남반구의 여름은 막바지를 향해 기울고 있다. 뙤약볕이 대지를 달구기 전, 이른 아침 공기를 가르며 걷는다. 소나무 숲 쪽에서 바람이 스치면, 나뭇결이 부딪혀 작은 파문을 만들고, 그 위로 매미 울음이 두텁게 덮인다. 사방이 온통 여름의 울림이다.



사실 노란색은 한때 특별할 것 없는 색이었다.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는 무채색 같은 배경색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노랑은 마음속 깊은 곳, 쉽게 꺼내지 못하는 자리로 박혀버렸다.


12년 전의 평범했던 아침, 화면 속 진도 앞바다에서는 거대한 여객선 한 척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모니터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흘렀고, 배는 끝내 가라앉았다. 그 안에는 우리 집 큰딸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화면 너머 아이들의 부모와 나의 가족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멀리 떨어진 뉴질랜드에서도, 그날의 통증은 살갗을 파고들 만큼 생생했다.


그 후로 노란색은 내게 각인되었다. 그 색을 마주할 때마다,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4월, 뉴질랜드의 가을. 바람에 흩어지지 않는 노란 기억은 여전했다. ‘부디 안전하게 돌아오기만을’ 바라던 간절한 기도는, 시간이 흐르며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단단한 다짐으로 변해갔다.



여름이 한 달 남짓 남은 지금, 해바라기밭의 수많은 얼굴은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다. 결코 땅을 보지 않는다. 무엇이 그토록 간절한가. 태양을 피해 서지 않고, 온몸으로 빛을 받아낸다. 작은 정원 구석의 금계국과 민들레도 유난히 샛노란 얼굴로 바람 속에 흔들린다.


여름은 그렇게, 뜨거운 노랑을 머금은 채 천천히 다음 색으로 번져갈 준비를 한다.



일러스트

by Eunjoo Doh



잊지 않겠다는 마음은, 노란 꽃처럼 다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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