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oo Doh Aug 11. 2024

대자연의 위로, 감동 그리고 두려움

포기하는 것도 용기

 겨울은 어느새 달음박질쳐 겨우 한 달만 남겨놓았다. 올해는 예년보다 훨씬 춥기도 하고 남섬의 서던 알프스 지역은 유독 눈도 많이 내리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겨울이 지나가기 전 그동안 미뤄졌던 캐슬힐 피크(castle hill peak) 등반을 위해 이른 새벽길에 올랐다. 몇 주 전 그리고 며칠 전 또 한 번의 눈이 내렸다는 소식에 마음은 더욱 들떠있었다. 구름과 바람이 없는 최상의 조건의 날씨를 기다리느라 몇 날들을 지체해야 했고 드디어 그 어느 하나 방해되지 않는 최적의 날이 돌아왔다.


 지난 5월 말에 출발했던 시간보다 한 시간 앞당겨 7시 30분에 출발했고 산을 향해 가는 길은 점점 밝게 비치는 여명으로 물들어갔다. 연한 핑크톤과 스카이 블루톤이 서로 뒤섞인 아름다운 자연의 색은 추운 겨울날 몸과 마음까지 몽글몽글해지게 만들었다. 파스텔톤이 내려앉는 기다란 띠를 두른 설산은 뉴질랜드의 겨울풍경을 제대로 만끽하게 해 주었다.

한 시간을 달려 8시 30분경 주차장에 도착했고 차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모든 겨울 장비들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스패츠를 신고 아이젠을 꼼꼼하게 신었다.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무거운 백팩을 메고 출발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주차장에는 차 한 대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한 커플만 있었을 뿐이었다. 지난 5월 말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과 마주했다. 초입에 깔려있던 자갈밭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여 온 천지가 겨울왕국이었다. 완만한 길을 통과해 점점 경사가 심해지는 구간에 들어서자 눈은 종아리까지 닿기 시작했다. 앞서 걸었던 발자국만 뒤따라 걸어야 했고 어마한 깊이는 한걸음 한걸음 때일 때마다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속도는 당연히 줄 수밖에 없었다. 단단하게 굳은 급경사에서 떨어지는 눈덩이 소리는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중간지점인 1500m까지 올랐으니 그동안에 갈고닦았던 훈련이 수포로 돌아가진 않았다.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설산 사이로 보이는 린든 호수는 더욱 찬란하게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감상도 잠시 간단한 간식을 챙겨 먹은 후 곧바로 출발했다. 그 새 저 멀리 보이던 한 커플은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인지 언제 뒤 따라왔는지 모르게 제쳐버렸다. 약간의 경쟁심이 올라오려 했으나 절대 산 앞에서는 해서는 안될 행동이란 것을 마음에 새기고 페이스를 유지하며 걷고 또 걸었다. 눈앞에 펼쳐진 높은 산을 넘으면 그 앞에 또 하나의 산이 기다리는 끝없는 경사 오르기를 반복했다. 아이젠 착용으로 인한 무거움은 체력소모를 더욱 가중시켰다. 또한 산의 지형에 따라 보행법을 바꿔가며 걸어야 했다. 덕분에 킥 스텝, 사이드 스텝, 뒤꿈치로 걷는 플런지 스텝 등 다양한 방식으로 걷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산행 전 바꾼 계획이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는 상황을 최대한 줄이려 행동식으로 하기로 하고 모든 간식거리들을 소분해서 나눠 준비했다. 손쉽게 걸으며 꺼내 먹을 수 있도록 겉옷 주머니에 넣고 중간에 쉬지 않고 걷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체력이 고갈되기 전에 수시로 꺼내 먹으며 3시간 만에 포기 피크(foggy peak)에 도달했다. 시간은 11시 30분이었고 정상까지는 아직 여유 있는 시간이어서 곧바로 정상을 향해 전진했다. 급하강 길을 내려가 또다시 이어지는 급경사 길을 또 올랐고 지난번 멈췄던 마지막 지점을 지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동안에 지나쳐왔던 산행은 빙산의 일각이었던가! 진정한 겨울 등반은 이제부터였다. 잡지책에서만 봤던 거대한 알파인 등반 뷰가 코앞에 펼쳐졌다. 믿을 수 없는 환상적인 겨울산과 마주하던 순간이었다. 새하얀 백설기 같은 눈이 뒤덮인 깎아지른 듯 한 산맥들 사이를 걷는 기분은 마치 히말라야 등반을 하는 착각이 들만큼 살벌함과 동시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강한 바람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곡선의 눈 덮인 능선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과 희열감에 벅차올랐다. 이것이 과연 실제란 말인가! 꿈같은 현실에 손가락으로 볼이라도 꼬집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잠깐의 감상을 끝내게 만들었고 곧바로 긴장감이 감돌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온몸에 힘을 실어 걸었다. 절벽에 다다르기 시작했을 때쯤 서서히 몰려오는 살벌함에 오른쪽 경사면은 아예 쳐다도 볼 수 없었다. 저만치 앞서 걷던 남편은 쉬면서 지켜봤고 다가가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곳은 마지막 최고의 난이도 구간인 정상을 바로 앞에 둔 마지막 지점이었다.


"이제부터 정말 조심히 걸어야 해!"

,,,,,,,

 


 매끄럽게 눈 덮인 높고도 거대한 산봉우리는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 속에 놓여 있었다. 한쪽 면은 태양의 황금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다른 쪽은 깊고 짙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이 극명한 대조는 봉우리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며, 산의 힘과 웅장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마치 그것은 대자연이 거대한 붓으로 그린 수묵화처럼, 산봉우리는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서 그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발이 멈추어 버렸고 더 이상은 한걸음도 앞으로 뗄 수 없을 만큼 압도되었다.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들긴 했으나 남편에게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다는 대답을 했고 남편은 곧 수긍하며 받아들였다. 우리는 더 이상의 미련 없이 돌아가기로 결정을 했다. 등산은 99%의 행운이 아니라 1%의 불운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순간의 무모함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는 일이다. 1900m 가까이 달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주 충분히 만족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건네주는 산의 격려를 듬뿍 받았다. 그곳에서 인생 최고의 알파인 등반이었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자칭 산을 오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라며.


 

 뒤돌아서 하산하기 시작했고 포기 피크에 도착하기 전 바람이 잦은 능선 위에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로 점심을 먹었다. 눈앞에 펼쳐진 병풍 같은 설산을 마주하며 다시는 맛볼 수 없는 눈밭 위의 식사를 한 샘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눈을 헤치며 걸었다. 눈 쌓인 겨울 산행이 좋은 점은 하산할 때이다. 미끄러운 자갈길을 걷는 것 보다도 발 뒤꿈치로 밀어서 걷는 플런지 스텝으로 걷는 것이 깊이 쌓여있는 눈 위에서 훨씬 수월하다. 물론 급하강 길에 방심은 금물이다. 스키장의 슬로프와도 같았던 산에서 역시나 스키를 타는 몇몇 사람들도 만났고 스노 보드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한 커플도 만났다. 저 멀리 시야에서 주차장이 보일 때쯤 가까이에서 만난 젊은 남자는 기다란 스키 플레이트를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짧은 인사를 건네고서는 스키를 탔냐고 물었고 그는 연습 삼아 왔는데 돌들이 많아 잘 타진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저 멀리 올라가면 기가 막힌 슬로프가 널려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지친 몸뚱이에 입밖에 내지도 못한 채 지나쳤다.

주차장은 거의 다가왔고 이른 아침때와는 사뭇 다른 여러 대의 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겨울이어도 눈 구경하기란 쉽지 않아 지나치다 들렀던지 아니면 일부러 이곳까지 온 게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어린 딸들을 데리고 눈썰매를 태워 주겠다고 시간을 내어 왔던 재밌는 옛 추억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거의 가까이 다가가보니 역시 나의 생각이 들어맞았다. 많은 가족들은 저마다 눈썰매들을 타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깔깔대고 비명을 지르며 신나게 겨울 놀이에 흠뻑 빠져있었다. 뉴질랜드는 어드벤처 천국임이 틀림없다.


  총 7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차에 도착해 서로 하이파이브를 날리며 고생했다고 서로 위로와 안도의 미소를 건넸다. 차에 올라타 "캐슬 힐 피크는 여기까지인가 보오!! " 라며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죽을 때까지도 못 오를 수많은 산들이 기다리기에 단 한치의 미련도 두지 않는다. 온몸에 차오르는 성취감을 그다음 날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밤새 종아리가 아파 잠을 설쳐댔지만 아침부터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하기만 하다. 끝내지 못한 숙제를 마쳤으니 이제 또다시 그다음 산을 오를 계획을 세운다.

 

 인생 최고의 알파인 등반을 허락한 이름만큼 아름답고 웅장한 겨울왕국의 거대한 성, 캐슬 힐 피크여!!

정말 고맙다! 행복했던 시간이었어!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photo by Eunjoo Doh

매거진의 이전글 빙하?…얼음 ‘빙’에 강 ‘하’ …얼음으로된 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