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oo Doh Aug 09. 2024

여기는 여전히 아날로그

엄마 뱃속부터 무덤까지



  뉴질랜드에서 살아가면서 확연히 느껴지는 문화 차이가 몇 가지 있다. 그중 손에 꼽을만한 것은 종이 카드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종이에 그림들이 프린트된 온갖 카드들을 말한다. 보통 카드하면 생일이나 결혼, 졸업정도의 축하 카드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생일 카드도 쓸까말까였을만큼 손으로 직접 적어 건네는 카드 문화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요즘처럼 맛집을 찾아다니며 입의 즐거움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먹고살던 때였으니까.

 

 이곳 뉴질랜드에서 판매되는 카드 종류는 커다랗게 분류해서 스무 가지 이상이고 세세하게 목록별로 구분하면 무려 마흔 가지 이상이다.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베이비샤워 카드부터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죽음으로 인한 커다란 상실에 위로를 위한 카드까지 그야말로 태생 전부터 무덤까지 전 일생을 아우르는 어마한 카드 세계가 존재한다.

카드의 세계를 소개하자면 이러하다.

베이비 샤워, 성별 구분해 놓은 출생, 한 살부터 100살까지 숫자가 적혀있는 Age 카드,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아내, 남편, 오빠, 동생, 이모, 삼촌, 조카, 손자, 손녀, 사위, 며느리, 친구, 약혼, 결혼, 결혼기념일, 졸업, 이사, 이별, 행운, 여행, 퇴직, 유머, 쾌유, 일 년 행사들인 부활절, 마더스데이, 파더스 데이, 크리스마스 그리고 감사카드 등이 있고 이 중 가장 압도적인 하이라이트는 축하 카드 보내는 것이 늦었다고 보내는 카드라 할 수 있다.

“Happy belated birthday “

Sorry this card is a little late. I remembered your birthday, I just forgot the date.


이 얼마나 카드계의 최고봉이란 말인가.


  일하는 가게에는 이런 모든 카드들이 꽂혀있는 렉이 12개가 있고 총 카드 수는 적어도 800개 이상일 것이다. 수많은 그림과 글들이 적혀있는 카드들을 고르느라 시니어 고객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곤 한다. 30분은 기본이고 어떤 때는 한 시간 이상을 고르느라 초집중을 하는 손님도 상당히 많다. 그림의 분위기나 글귀의 감동적인 표현을 꼼꼼하게 살펴 읽으며 신중히 선택한다. 그 모습은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과 다른 점은 카드마다 속지에 문구가 인쇄된 카드들이 대부분이다. 겉면에 그림만 있는 블랭크 카드도 있다. 요즘은 예쁜 일러스트 그림이 인쇄된 블랭크 카드도 점점 인기 품목이 되어가는 추세다. 여하튼 주 고객들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어서인지 안에 적혀있는 문구를 보고 고른 후 보내는 사람과 본인의 이름만 적어 보내기도 한다. 아주 가끔씩 값을 치르고 펜을 빌려 즉석에서 글을 적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이처럼 그들의 카드 문화는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손님이 있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는 예쁜 생일 카드를 하나 고르더니 계산을 하고 나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본인은 악필이어서 도저히 이 카드에 메시지를 적지 못하겠다며 나에게 써줄 수 있겠냐고 정중히 부탁을 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따뜻한 미소를 한번 날려주고서는 그가 써준 문구를 정성스럽게 적어 건넸다. 또 한 분의 고객은 등이 약간 굽어 키가 자그마하시고 인자한 인상에 언제나 웃는 얼굴로 들어오시는 할아버지 한분이시다. 그분은 대부분 카드만 구입을 하신다. 어느 날은 한창을 고르신 후 계산대로 가져오시며 짧은 대화를 나누셨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인데  아내가 이 카드를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어린 소년처럼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할아버지의 생애동안 세상의 모든 평화와 사랑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이다.


 인쇄된 글귀로만 보내든, 직접 짧은 글을 적어 보내든 작은 마음을 담아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작고 예쁜 카드를 건넨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행위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악행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비열하고 각박해지고 냉소적인 세상에 살지만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이러한 지옥 같은 세상에도 천국이 있음을 알게 될 테니까.

 거대한 카드의 세계는 새로운 디자인들이 끊임없이 출시되고 그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연을 주문하고 내 눈은 휭휭 돌아가고  세상도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일러스트

Eunjoo Doh

매거진의 이전글 인사 배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