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
아버지는 쥐꼬리만 한 시계방으로는 일곱 남매를 먹여 살리기 버거우셨던 모양이다. 가게 방을 큰형에게 맡기고, 아버지는 이복형이 있는 안성 큰집을 찾아가셨다. 직산에 방치된 황폐한 종중산을 개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러 가신 것이다.
서자 출신인 아버지에게 종중산 지분은 없었다. 큰집은 이미 그 산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사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산을 개간해 놓으면 값이 오를 테니, 그동안 나오는 농산물만이라도 갖게 해 달라고 제안했다. 얼마쯤 개간이 되면 산의 가치가 오를 거라는 계산에, 큰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시작된 남산은 우리 가족에게 또 하나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집에서 직산까지는 비포장도로였고, 버스로는 15분에서 20분 남짓 걸렸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남산까지는 다시 30여 분을 걸어야 했다.
몸이 몹시 피곤하거나 급한 일이 아니면 버스를 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식구들 대부분은 남산까지 걸어 다녔다. 지금 기억으로는 한 시간 반, 길면 두 시간쯤 걸렸던 듯하다.
“형, 초콜릿은 어떻게 만들어?”
남산으로 걸어가던 길에 나는 닷째 형에게 물었다. 전에 미군에게 얻어먹었던 초콜릿의 황홀한 맛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꺼낸 질문이었다. 이런 사소한 궁금증들이 무료한 남산 길의 단골 대화였다.
“남산에 가보면 알아.”
형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굴을 파다 보면 갈색 진흙이 나오는데, 거기에 설탕을 넣고 불에 구우면 초콜릿이 되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나는 단팥빵 속 앙금처럼 모래흙 사이에서 드러난 갈색 흙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들이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파키스탄에서는 묽은 흙에 버터 물을 발라 동그랗게 빚은 과자를 만든다고 한다. 햇볕에 바짝 말린 그 흙 버터 과자는 배고픈 아이들의 간식이라니, 꼭 거짓말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땅굴집 사람들’이라 불렀다. 낯선 사람들이 산기슭에 굴을 파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남산으로 올라가 좁은 굴을 조금씩 넓혔다. 혹시라도 무너질까 나무틀을 세워 석탄갱도 흉내를 냈지만, 나무조차 귀해 기둥 몇 개만 세운 채 사람이 누워 잘 정도의 공간만 확보했다.
산기슭 아래 땅굴은 여름이면 시원했다. 문제는 난방이었다. 어머니는 면내에서 세멘트를 구해와 부뚜막과 구들방을 만들었지만, 제 구실을 못 했는지 종종 밖에서 음식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천막이나 판자로 임시 거처를 짓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왜 굳이 굴을 파고 살아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아무튼 그렇게 땅굴 집은 완성되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먹고 자며 ‘개간’이라는 삶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