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정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옷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소매를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이야 포크레인이 있어 산을 개간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때는 곡괭이와 삽이 전부였다. 온종일 땅을 파도 고작 몇 미터쯤 나아갈 뿐이었고, 바위라도 만나면 사흘, 나흘은 헛일을 하곤 했다.
그렇게 개간은 시작되었다.
석 달쯤 지나자 조그만 계단식 밭이 생겼고, 그곳에 옥수수가 심어졌다. 땅이 생기면 씨를 뿌리고, 다시 땅을 일구며 밭을 조금씩 넓혀 나갔다. 그렇게 산은 서서히 사람의 숨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더운 날이면 몸을 식히라며 조그만 웅덩이를 하나 파 주셨다. 어린 나에게 그 웅덩이는 작은 풀장이었고, 작물들에게는 갈증을 달래 주는 생명수였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그 물속에는 개구리가 헤엄쳤고, 가끔은 뱀도 내려와 더위를 식혔다.
아버지는 소나무에 원두막을 지으셨다. 나는 톰 소여가 된 것처럼 그 원두막을 나만의 본부 삼아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렸다.
나의 여름방학은 남산의 수많은 별들과 반딧불이었다. 산은 밤마다 맹꽁이와 산비둘기의 울음으로 소란했고, 뻐꾸기와 꿩은 잊을 만하면 제 목소리를 내질렀다.
어느 바람이 휘몰아치던 밤,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천둥과 번개로 요란했다. 후두둑, 후두둑 장대비가 쏟아졌고, 번갯불에 비친 빗줄기를 보고서야 빗방울이 아니라 물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찌지직거리는 라디오에서는 태풍주의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강한 바람과 많은 비가 내리고 있으니 시설물 관리에 주의하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다섯째 형과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땅굴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배수로를 살피고 돌아온 어머니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계셨다. 어머니는 빨랫줄에 젖은 옷을 널고는 간식거리로 감자를 굽기 시작하셨다.
기름이 다 되었는지, 아니면 심지가 다 타버렸는지 호야등 불빛은 점점 희미해졌다. 뜨겁게 익은 감자를 호호 불며 허기를 달래고 있는데, 땅굴 안쪽 벽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닥에는 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얼른 땅굴에서 나가라고 하셨다.
국방색 군용 손전등을 우리 손에 쥐여 주며 원두막으로 가 있으라 하셨다. 물을 잔뜩 머금은 흙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땅굴에 있던 살림살이를 하나라도 더 건지려 애를 쓰셨다. 원두막으로 피신한 우리는 한참이 지나도 어머니가 오시지 않자 점점 불안해졌다.
그때 갑자기 우르릉,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땅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형이 어머니를 찾으러 내려가려는 순간,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울음을 삼키다 못해 눈물이 터지려던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살림 몇 가지를 더 건지느라 늦었다고 하셨다.
거센 비바람은 원두막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번개는 하늘을 하얗게 칠했다가 비에 씻겨 내려갔다. 천둥은 마치 오래 쌓인 울분을 토하듯 커다란 소리로 울부짖었다.
우리는 이불 속에서 눈만 깜빡이며 밤을 지새웠다. 언제 아침이 왔는지도 모르게, 따스한 햇살이 눈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어머니와 다섯째 형은 이른 아침 무너진 땅굴로 내려가 혹시 건질 것이 없나 살펴보았다. 나는 눅눅한 이불을 밖에 널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은 마치 밤새 천둥과 번개를 몰아친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이상하게 몸이 자꾸 으슬으슬 떨렸다. 한 시간이쯤 지났을까, 어머니와 형은 냄비 몇 개와 쇠스랑을 들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늦은 아침밥을 지으려 하시기에 머리가 아프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손으로 내 이마를 짚으시고는 깜짝 놀라셨다. 나는 잘 몰랐지만 열이 꽤 올랐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체온계가 있지만, 그때 어머니의 손이 곧 체온계였다. 어머니는 밥 짓는 것을 멈추시고 세숫대야에 물을 떠 와 물수건을 이마에 연신 올려 주셨다. 그리고 다섯째 형에게는 아랫마을 복주네에 가서 염소젖 한 그릇을 얻어오라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정성과 형의 보살핌 속에서 반나절을 더 잠들었다. 어머니의 물수건 덕분인지, 형이 얻어 온 염소젖 덕분인지, 오후가 되자 열도 내리고 기운도 조금씩 돌아왔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뭉게구름이 솜사탕처럼 떠 있었다. 오후 늦게 한 차례 장대비가 더 내리더니 이내 그쳤다. 해 질 녘, 햇살 속에서 하얀 물안개가 산 너머 계곡으로 흘러갔다. 서쪽 하늘에는 낮에 뜬 희미한 반달과 함께 작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밤하늘의 별, 어머니, 형, 바람, 산짐승 소리, 그리고 무지개.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아득하고도 따뜻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