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무당이었다.
요즘처럼 누구나 명함 하나 만들어 내걸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옛날의 무당은 글을 알아야 했고, 춤과 노래에도 능해야 했다. 한과 흥을 함께 품은 몸, 그 몸에 신기(神氣)가 내려앉아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무당이라 불렀다.
그들은 술집의 잡부처럼 천대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주술과 굿을 행하는 기생이었고, 세상의 그늘과 욕망을 동시에 건너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때로는 재물을 쥔 양반의 하룻밤 상대가 되는 일도 생업의 일부였다. 그런 삶 속에서 아이를 갖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늘 그 다음이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미운 가시가 되었다.
양반들은 “근본을 모를 아이를 어찌 내 자식이라 하겠느냐”며 외면했고, 무당들은 “네 씨니 네가 책임지라”며 아이를 안고 양반집 문 앞에 내려놓은 채 훌훌 떠나버렸다. 책임은 언제나 힘없는 쪽의 몫이었다.
첩의 자식은 서자(庶子)라 불리며 그나마 보릿 죽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었지만, 무당의 자식은 누구의 피인지 조차 분명치 않아 도움의 손길에서 완전히 밀려나곤 했다. 그런 아이들 대부분은 굶어 죽거나, 마음씨 착한 이웃의 품에 잠시 맡겨졌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남의 집 종살이나 하인 살이로 흩어졌다.
아버지는 그런 기생의 아들이었다.
안성 보금당 한약방 사장이 친할아버지라는 말도 떠돌았지만, 그저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는 이야기일 뿐, 누구도 확언하지 못했다. 기록도, 증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젖먹이 아이였던 아버지가 어떻게 돌고 돌아 직산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곳에서 자라셨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밤 나무쟁이 기녀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했고, 칠성무당의 자식이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말들을 묵묵히 견디며 자라셨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아버지는 어느새 아홉 남매의 가장이 되셨다. 금슬이 좋아서였는지, 힘이 좋아서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와 대동아전쟁,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도 아버지는 자식들 밥을 굶기지 않으셨다. 근면함과 성실함도 있었겠지만, 그 시절엔 드물었던 고급 기술, 시계 수리공이셨기에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고장 난 시간들을 붙들어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 곧 생업이자 삶의 버팀목이었다.
1·4 후퇴 때 병을 얻으셔서 서울로 가지 못하고, 고향 근처 성환에 머물게 된 일이 결국 평생의 터전이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아이를 낳아두고 사라졌던 밤나무 쟁이 할머니가 다시 나타났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늙고 병든 몸으로 갈 곳이 없다며 생모라 주장하며 아버지 집 문턱을 넘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그 할머니를 받아들이셨다.
들리는 말로는, 할머니는 아버지를 버린 뒤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려 이복동생 셋을 낳았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과 기근이 그쪽 삶도 무너뜨렸고, 결국 아버지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그 사정을 묻지 않았다. 말 대신 침묵으로, 침묵 대신 밥과 잠자리로 할머니를 모셨다.
할머니는 치매 기운이 있으셨고, 콜록콜록 잔기침을 자주 하셨다. 결핵은 아니었지만, 가끔 가래를 뱉을 때면 누런 덩어리에 피가 섞여 나왔다. 씻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는지, 가까이 다가가면 청국장이 썩는 듯한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 형제들은 아무 말 없이 코를 막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다녔다.
그때는 몰랐다.
그 냄새와 기침, 흐릿한 눈빛 속에 한 사람의 일생이, 한 시대의 그림자가 함께 묻어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