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절

어머니

by 이의준평택

어머니

프라이팬 위에서 계란이 천천히 익어간다.

지글거리는 소리 사이로 흰자리가 가장자리를 먼저 굳히고, 노른자는 아직도 망설이듯 흔들린다.


오늘 아침 식탁에는 계란 프라이 한개, 당근 몇 조각, 빵 한 조각, 그리고 요구르트가 전부다. 계란을 깨기 위해 탁자에 탁 부딪히는 순간, 금 간 껍질 사이로 오래된 기억이 오늘도 어김없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초등학교 4학년, 배고픔이 일상의 중심이던 나이였다. 여름을 앞둔 유월, 숨이 막힐 만큼 더운 날씨에 땀은 비처럼 쏟아졌고, 허기는 앞서 달리다 어느새 내 등짝에 올라타 집까지 등을 떠밀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늘 그 배고픔과의 경주였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를 불렀다.

부엌에서 일을 하시던 어머니는 늘 그렇듯 나를 반겨 주셨고, 아무 말 없이 껍질이 벗겨진 하얀 계란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셨다. 내가 배고프다는 사실을, 아니 배고프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신 얼굴이었다.


그 시절 계란은 귀한 음식이었다. 운동회나 소풍날에나 겨우 만날 수 있는 특별 식이었다. 내 눈은 번쩍 뜨였고,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계란을 삼켰다. 허겁지겁 먹는 나를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물 한 사발을 내밀며 말씀하셨다.


“천천히 먹어라.”

물을 들이켜는 순간, 속에서 싸늘한 예감이 스쳤다.


“이거… 할머니가 드시던 거 아냐?”

어머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이야기를 꺼내셨다.


옛날 임금님이 계란을 무척 좋아했는데, 점심때가 되자 왜 계란이 늦느냐고 호통을 쳤단다. 급해진 궁녀가 계란을 쟁반에 올리자, 이리저리 굴러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곤경에 처한 궁녀는 꾀를 내어 계란에 침을 살짝 발라 쟁반에 올렸고, 그러자 계란은 더 이상 굴러가지 않았다. 그 계란을 드신 임금님은 오늘따라 유난히 맛있다며 궁녀를 칭찬하고 상까지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조용히 덧붙이셨다.


“세상살이는 말이다,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단다.

그래, 맞다. 그 계란은 할머니가 드시려다 내려놓은 거다. 그래도 엄마가 펌프 물에 깨끗이 씻었으니 괜찮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미 위 속으로 들어간 계란을 토해내려 깩깩거리며 애를 썼다. 하지만 헛구역질만 나올 뿐, 계란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 미워, 미워”를 연발하며 울먹였고, 어머니를 원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내가 더 울고 떼를 썼다면 어머니는 내 등짝을 한 대 후려치며 어디 할머니 계란이 더럽냐고 꾸지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 말 없이 계란을 입에 넣어 대신 빨아내고는 “엄마가 소독했다”며 펌프 물에 휘릭 씻어 다시 내게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배웠다.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로 하는 훈계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이 있다는 것을.


어릴 적 나는 꽤나 짓궂은 아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 발목 가까운 오른쪽 종아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셨다. 미군 철조망을 넘다 종아리 안쪽을 찔린 적이 있었는데, 지혈만 하고 며칠 지나면 낫겠지 싶어 상처를 방치했더니 그 자리에 고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을 짜내도 다시 위쪽으로 부어오르자, 어머니의 얼굴에는 이번엔 끝을 보겠다며 팔을 걷어 붙이셨다. 아까징끼와 소독 거즈, 낡은 붕대를 옆에 두고 어머니는 내 다리를 단단히 붙잡으셨다. 거즈로 고름을 대충 짜낸 뒤, 상처 깊숙이 박힌 고름 근을 빼내기 위해 상처에 입을 대고 몇 번이나 빨아내셨다. 그리고는 마이신 가루를 뿌리고 붕대를 칭칭 감아주셨다.


어머니의 정성이 통했는지, 아니면 미제 마이신의 효험이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렇게 말썽이던 상처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어머니의 입은 어떤 수술 도구보다도 정확했고, 치료 또한 확실했었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분을 닮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내 종아리에는 어머니가 빨아주셨던 자리, 사랑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 상처는 더 이상 아픔이 아니다.

어머니가 내 몸에 남겨두고 간,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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