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절

왕 딱 지

by 이의준평택

왕 딱 지

어머니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골목 안쪽에서 “딱—”, “따악—”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민수 패거리가 길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바닥을 향해 힘껏 내리치는 딱지 하나가 유난히 만만치 않아 보였다.


민수는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골판지를 여러 겹 접은 대왕딱지였다. 손에 쥐어 보니 묵직했고, 바닥에 닿는 면에는 쿠션감까지 느껴졌다. 다른 딱지들을 뒤집기엔 더없이 좋아 보였다.


민수는 집으로 가려는 나를 붙잡고 딱지치기를 하자며 계속 졸랐다. 전에 내게서 뺏어 간 딱지를 일부러 흔들어 보이며 약을 올리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대왕딱지에 맞설 만한 것이 없는 나로서는 선뜻 나설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그때 문득, 집 벽장에 널려 있던 빳빳한 종이가 떠올랐다.

상장이었다.


우리 집은 아홉 남매였다. 머리가 좋은 집안이었는지, 아니면 어머니의 극성이 만든 결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등상이며 개근상이며 상이란 상은 형들이 죄다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상장을 들고 와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상장을 못 받아오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위의 형들이 모두 공부를 잘하니, 밑에 있는 동생들은 죽을 맛이었다.


‘시집간 딸은 죽어도 시댁에서 죽는다’는 말처럼, 아무리 아파도 우리는 학교에 가야 했다. 땡땡이라도 치는 날엔 매를 맞고 밥까지 굶었다. 그런 어머니의 독한 교육 덕분인지, 나 역시 졸업할 때 6년 개근상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일이다.


나는 슬금슬금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에는 상장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종이들이 마치 갑옷을 입은 장수들처럼 보였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상장을 하나둘 모았다. 상장들은 마치 제발 밖으로 데려가 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먼지가 가득한 상장 십여 장을 툭툭 털어내고 딱지를 접기 시작했다.


무게를 더하려고 상장을 두 겹으로 겹치고, 칼국수 밀 때 쓰는 홍두깨로 모서리를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었다. 얇고 단단하게 날이 선 딱지는 바닥을 파고들며 어떤 딱지든 뒤집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잽싸게 민수패거리에게 달려가서 딱지치기를 했다. 내 정성이 통했는지, 아니면 ‘상장’이라는 글씨에 기가 눌렸는지, 민수의 딱지는 힘없이 넘어갔다. 마지막 대왕딱지도 몇 번 버티는 듯 하더니 네 번째 합에서 그대로 뒤집어졌다.

민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여기서 기다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있는 딱지를 몽땅 들고 나올 기세였다. 그때 동생의 목소리가 골목을 갈랐다.


“오빠! 빨리 와— 엄마가 저녁 먹으래!”

“알았어.”

나는 딱지들을 급히 주워 모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을 씻고 마루에 올랐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양푼이가 놓여 있었고, 숟가락은 형제 수만큼 꽂혀 있었다. 형제들은 둥그렇게 어깨를 맞대고 밥을 먹었다. 막내는 늘 그 틈에 끼지 못했기에, 어머니는 따로 밥을 챙겨 주셨다.


나는 형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밥을 빨리 먹어야 했다. 밥 위에 금을 그어 선을 넘지 말라고 소리도 쳤다. 하지만 형들은 슬슬 그 경계를 파고들었고, 나는 숟가락으로 형들의 숟가락을 탁탁 쳐내며 버텼다. 하지만 여러 형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나는 밥에 침을 뱉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형들은 “더럽다”고 소리치며 내 뒤통수를 한 대씩 치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많이 처먹어라.”

형들은 그렇게 자리를 떴다.

그 습관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밥을 참 빨리 먹는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왜 그렇게 빨리 먹느냐는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살아남으려고 그랬던 버릇이라… 쉽게 안 고쳐지네.”

그러고는 껄껄 웃는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운 이유는 함께한 정일 것이다.

딱지 속에는 즐거움이 있었고 행복이 가득했고,

양푼이 속에는 비좁지만 끈끈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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