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절

천 자 문

by 이의준평택

천 자 문

아버지는 술이 얼근히 오르신 얼굴로 동네 아저씨 두 분을 모시고 들어오셨다. 집 안에는 술 냄새와 함께 아저씨들의 소리로 시끄럽다.아저씨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 한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셨던가 보다. 아버지는 문득 나를 부르셨다. 방 안에서 딱지를 접고 있던 나는 “네—” 하고 대답하며 마루로 달려 나갔다.

“이리 와서 천자문을 외워 보거라.”

아버지는 잘 익은 수박을 바라보듯 흐뭇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셨다. 전에 이미 아저씨들 앞에서 천자문을 외운 적이 있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 앞에 앉았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입에 익은 문장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소리에 아버지는 잔을 들어 아저씨들을 향해 내미셨다. “한잔하세.” 그 얼굴에는 자식에 대한 자랑이 가득 배어 있었다.


아저씨들은 무릎을 탁 치며 “거참, 똑똑한 아들을 두어서 좋겠네” 하고 연신 감탄해 하셨다. 어느새 나는 마지막 구절인 “어찌 언, 어조사 재, 어조사 호, 어조사 야”까지 모두 외웠고, 그제야 아저씨들은 “신통하네” 하며 십 원짜리 지폐 한장을 내 손에 쥐여 주셨다.


나는 공손히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일은 몇 번 더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아저씨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술술 천자문을 외우는 나를 은근히 내세우셨다.

하지만 자랑에도 끝이 있는 법이라, 더 이상 보여 줄 사람이 없어진 뒤로는 나를 부르는 일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내가 천자문을 외우게 된 건 어머니 덕분이었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집에서 글을 배웠다. 그 시절엔 한글보다 한자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공부’라고 하면 으레 한자를 떠올리던 시절이었으니, 어머니는 학교에 가기 전 천자문만큼은 떼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린 나는 글을 이해해서 외운다기보다는, 그저 순서를 입에 익히는 정도였다. 쓰면서 배웠어야 했겠지만, 어린 손으로 붓을 잡는 일은 버거웠다.


어머니는 늘 회초리 하나를 곁에 두고 계셨다. 틈만 나면 나를 불러 앉혀 천자문을 외우게 하셨다. 무릎을 꿇고 외우는 천자문은 어린 나에게 고문과도 같았다. 다리가 저리고 목이 잠기면 눈물이 날 것 갔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다 외우면 떡 해 줄게” 하며 나를 달래셨다.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입을 열어 천자문을 외웠다.


이른 봄에 시작한 천자문은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끝이 났다. 어머니는 수고했다며 내 등을 다독여 주셨고, 약속대로 백설기 떡을 해 주셨다. 붉은 맨드라미 꽃을 얹은 백설기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고, 가장자리에 둘러진 말린 호박은 그 떡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날의 달콤함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회초리를 들고 앉아 계시던 모습, 떡을 약속하시며 웃던 얼굴, 그리고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던 손길까지.

천자문은 오래전에 잊혔지만, 그 문장을 함께 외우게 했던 어머니의 시간과 마음은 아직도 내 안에 또렷이 남아 있다.


아래의 글은, 그렇게 천자문과 어머니를 떠올리며 오래전에 적어 두었던 기억의 한 조각이다.



이 별 (離別) - 이 의 준 -


어머닌 누우셨네.

반기는 이 없는 황량한 산기슭

흙 삽 떠 넣으며 어머닐 보내던 날


난 슬픔이 무엇인지 몰랐네.

어허 달고 소리와 슬피 우는 누이를 보면서

그저 눈물이 흘렀을 뿐이네.


힘든 투병을 마치고

조용히 눈을 감기 전

어머닌

아버지 잘 모셔라. 는

말 한마디만 남기시고 먼 여행을 떠나셨네.


모진 세월 그래도 정 때문인지 홀로 있을

아비가 걸리셨나 보네.


천자문 다 떼면 떡 해 줄게. 하시면서

헤어진 양말 꿰매며

자식 공부를 시키시던 어머니


아들의 성장 다 보지 못하고

묵주를 친구삼아 아주 멀리 떠나실 때

나는 또 눈물을 흘렸네.


그땐 이별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네.

오늘도

무성한 아카시아, 소나무를 벗을 삼아

지나온 일들을 이야기 하며

자식자랑에 웃음을 피우실 어머니


이렇게 눈 내리는 밤

따스한 옷 한 벌 못 해드린

아들이 못내 밉기만 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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