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수박
잊지 못할 수박
살아오면서 가장 맛있었던 수박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주)남산에서 먹었던 그 수박을 떠올린다.
주) 어릴적 잠시 살았던 직산면 조그만 야산
아마도 가을 문턱이었을 것이다. 밭에는 아침 이슬이 맺히고, 백로가 막 지났을 무렵. 여름 내내 수확을 마친 수박밭에는 늦게 자란 조그만 수박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듯 남아 있었다.
그런 수박들은 대개 돼지나 닭의 먹이가 되거나, 일을 하다 목이 탈 때 갈증을 달래는 데 쓰였다. 쪼개 보아 덜 익었으면 그대로 던져 사료로 쓰고, 가끔 운 좋게 익은 놈을 만나면 달달한 맛으로 목구멍을 적셔 주곤 했다.
그날도 이른 아침부터 닷째 형과 나는 수박 넝쿨을 거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배추를 심을 작정이셨다. 가을이라고는 해도 오전 열 시를 넘기니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다.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리고, 흙먼지가 달라붙어 피부가 따끔거렸다. 형은 조금만 더 하고 쉬자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이미 한계에 가까이 와 있웠다.
마지막 남은 넝쿨을 정리하던 중, 사방공사를 해 놓은 석축 아래에서 제법 큼직한 수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형에게 소리쳤다.
“형, 여기 큰 수박 있어!”
형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얼른 따서 평상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그 말은 이제 일을 접고 쉬자는 신호였다.
수박은 크기도 컸지만, 그늘 속에 숨어 있어서인지 손에 닿는 순간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차가웠다. 대야에 받아 둔 허드렛물로 겉을 한 번 씻어내고, 형은 부엌칼을 들어 수박을 갈랐다.
“쩍.”
그 소리와 함께 연분홍을 넘어 선명한 붉은 속살이 환하게 드러났다. 형은 능숙한 손길로 초승달 모양으로 수박을 썰어 내게 하나를 건넸다.
한참 갈증에 시달리던 나는 그 수박에 이를 갖다 대었다. 그 순간, 난 그대로 황홀감에 빠졌다. 달콤함과 시원함이 동시에 밀려와 바짝 말라 있던 목구멍을 단숨에 적셨다. 씹는다기보다 마신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수박은 부드러웠고 과즙은 넘쳐흘렀다.
차갑고 시원하면서도 녹아내릴 듯 감미로운 그 맛은, 그 어떤 수박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자연이라는 냉장고에서, 하늘의 별과 밤이슬을 보며 자란 수박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맛을 품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기운을 머금은 듯, 그 한 조각에 설명하기 어려운 황홀함까지 담겨 있었다.
그 후로 수없이 많은 수박을 먹어 보았다. 냉장고에 차갑게 식힌 수박도, 값비싼 값을 주고 산 수박도, 닷째 형과 남산에서 나눠 먹던 그 수박만큼은 맛나지 않았다.
그 수박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달콤한 맛으로 남아 있다. 단지 과일의 맛이 아니라, 땀과 햇살과 형제의 침묵이 함께 어우러진, 한 시절의 맛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