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둑
바 둑
대학 시절, 교내 바둑 경연대회가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나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과대표 자격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등수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대회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4강에서 우승자와 마주 앉아 돌을 놓았기 때문이다.
막판에 승부수를 던지며 끝까지 접전을 벌였으나, 고수의 노련함은 어떠한 허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수 한 수가 늪처럼 깊었고, 나는 그 안에서 서서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패배였지만, 바둑이 가진 세계의 깊이를 온몸으로 배운 대국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바둑을 둘 수 있었던 것은 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늘 바둑판이 펼쳐져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바둑을 잘 두던 이는 넷째 형님이었다. 형님은 언제나 『바둑의 정석』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셨다.
“두 점 머리는 두드려라.”
“붙이면 젖혀라.”
“빵 때림은 서른 집이다.”
바둑 격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돌을 놓던 형님의 모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 말들은 세월이 흘러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지금도 불쑥 떠오르곤 한다.
설날이면 형제들이 모여 신년 대국을 벌이던 시절도 있었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궁지에 몰리면 술잔을 권하며 위로를 건네고, 이기고 지는 것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했던 때였다.
그 풍습은 어느새 고스톱과 포커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꽤 멋진 풍경이었다. 아마도 모두가 함께 바둑을 두기 어려워지면서 자연스레 흩어진 것이리라.
형제들 가운데 첫째 형와 둘째 형은 유독 잡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으셨다. 삶을 꾸려가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탓이었을 것이다. 첫째 형님은 술을 좋아하셨고, 연세가 일흔을 넘긴 지금도 웬만한 사람과 대작을 나누실 만큼 기운이 좋으시다. 둘째 형님은 공무원 체질 그대로, 교직을 성실히 마치고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그런 둘째 형님이 바둑을 배우게 된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임용고시를 마치고 발령을 기다리며 아산만 방조제 공사 현장을 다니던 시절이다. 쉬는 날이면 나와 마주 앉아 바둑판을 펼치셨는데. 당시 나는 8급 정도의 실력이었고, 형님은 바둑의 ‘바’ 자도 모르는 상태였다.
바둑을 둘 때마다 매번 내가 이기자 형님은 오기가 생기셨는지, 아니면 바둑의 묘미에 빠지셨는지 점점 열심히 돌을 놓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형님은 이미 바둑판을 펴놓고 계셨고, 저녁상이 들어와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밤 11시, 때로는 자정까지 돌을 놓던 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둘째 형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시절이었을 것이다.
넷째 형님과의 대국은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실력 차가 워낙 커 접바둑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아홉 점을 깔고 두다가 점점 넉 점까지 좁혀 갔다. 그 시절이 내 바둑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였는지도 모른다.
하루는 대국을 마치고, 처음부터 다시 돌을 놓기 시작했다. 방금 두었던 판을 기억해 그대로 재현하는 복기였다. 잘못 둔수를 찾아내고, 패착을 줄이는 연습. 지금처럼 기록을 되돌려 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기에,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
그때는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거의 완벽하게 복기를 해냈고, 넷째 형님에게서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전 일도 가물가물한데, 그 시절의 나는 바둑판 위에 놓인 돌 하나하나를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런 사실이 이제는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다.
세월은 흘렀고, 바둑판 위의 돌처럼 기억도 하나둘 제자리를 벗어났지만, 그 시절 형들과 나누었던 대국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돌을 놓으며 배웠던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은 바둑판을 떠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