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골 서늘한 퇴근길. 30km에도 바퀴가 휙휙 돌아간다. 눈은 이미 발목을 덮었다. 도로는 살얼음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 그건 좋다. 최대한 조심히 가면 되니까. 하지만 뒤차가 도와줄 생각이 없다. 바퀴가 도는 걸 봤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한지. 든 것도 없는 트렁크 뒤에 바짝도 붙어온다. 혹시 미끄러져 뒤차를 박을까 걱정돼서 죽을 지경이었다. 차선을 바꿔 간신히 도망쳤다. 이번엔 옆에 트럭과 나란히 가게 됐다. 미끄러져 내 차를 향해 달려오진 않을까 두려웠다. (내가 원래 이렇게 겁이 많았나?) 위협을 받는 것도 모자라 눈발까지 거세다. 지독하게 스릴 넘치는 퇴근길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기로 했다. '어차피 차가 많아 사고가 나도 크게는 안 나겠지' 하면서 억지로 안정을 찾았다. 그리곤 많은 생각을 했다. '자연 앞에 인간은 하찮구나', '무섭긴 해도 오랜만에 이렇게 눈이 오니까 진짜 겨울 같다' 이런 잡생각들. 막히지 않을 때는 음악이나 들으며 집에 빨리 가자는 생각만 했는데 나름 운치 있었다. 그러다가도 차가 미끄러지거나 근처에 차가 바짝 붙으면 운치 따윈 깨고 생존에 힘썼다. 자연이고 나발이고 생존이 우선인 나는 역시 인간이 맞았다.
30분이면 충분한 퇴근길을 1시간이나 달려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서는 평소처럼 하루를 마무리했다. 밥 먹고 책도 읽고 TV를 보니 12시다. 밖은 아직도 눈이 한창이었다. 아침 출근길이 두려웠다. 혹시나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한 핑계...) 급하게 오전 반차를 냈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잠들었다.
오랜만에 평일 아침 8시에 눈을 떴다. (평소 5시 30분에 일어난다) 오후 반차는 많이 써봤지만 오전 반차는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한 달 뒤면 퇴사를 하는데, 앞으로 이런 생활이 지속된다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덕분에 처음으로 평일 오전의 여유를 즐겼다. 커피도 마시고, 일기도 쓰고, 산책도 했다. 어제 내린 폭설이 감사할 만큼 좋은 아침을 보냈다.
먹고살기 바빠 여유로움을 버렸던 게 못내 서글프다. 5분이라도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면 되는데 왜 그렇게 바쁘게만 살려고 했을까?. 왜 여유로우면 불안해할까?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 억지로라도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어봐야겠다. 아침에는 그런 목적으로 명상을 하니, 잠들기 전에 5분 동안 눈을 감고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