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이트메어 앨리’ 탐욕의 늪으로 침잠케 하는 달콤한 악몽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은 누구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대중이 공감할 수 있도록 쉽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사이, 감독 자신만의 철학을 군데군데 녹여내기란 분명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 이들만이 가능한 것일 터다. 그런 의미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는 거장 감독이라는 명성에 누구보다 걸맞은 작품을 내놓은 듯 하다. 그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는 1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15분으로 착각하게 하는 마법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할리우드 내 명성에 비해 국내 관객에게 마냥 친숙한 감독은 아니다. 그를 유명세에 올려놓은 대표작 ‘판의 미로’(2006)가 여러 어른들의 사정(?)으로 국내 관객에게 외면 받을뿐더러, ‘헬보이 2: 골든 아미’, ‘퍼시픽 림’ 등 그가 이후 내놓은 작품들마다 국내 관객과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2017년 연출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지난 제7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씨네필에 한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명성이 더욱 올라갔을 뿐이었다.
허나 오는 23일 개봉을 앞둔 그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는 거장 기예르모 델 토로라는 이름을 국내 관객들에게도 깊이 각인시켜줄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온갖 괴수를 탄생시키며 호러 영화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주로 그려왔던 그지만, ‘나이트메어 앨리’는 기이하게 생긴 괴수보단 인간 내면의 일그러진 탐욕을, 호러 영화의 공포스러운 이미지보단 스릴러의 짜릿하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형성시키는데 중점을 뒀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전보다 훨씬 대중적이고, 친밀하게, 그러나 그가 본디 지니고 있던 강력한 마력은 잃지 않고 영화를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나이트메어 앨리’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이야기 구성과 미장센이다. 영화는 시작과 끝이 모두 들어맞는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치밀하게 얼개를 엮어간다. 주인공 스탠턴(브래들리 쿠퍼)이 발걸음을 옮기고 처음 말문을 여는 그 순간부터 영화의 막이 내릴 때까지, 모든 요소가 복선이자 암시다. 사소한 요소 하나라도 미리 언급하는 순간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참을 수밖에 없는 지금이 아쉬울 따름이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소품 하나, 배우가 내뱉는 대사 하나와 찰나의 표정 모두가 중요하다.
치밀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로 영화는 단숨에 관객의 심장을 옭아맨다. 숨막히게 흘러가는 흐름 가운데 무서운 장면은 전혀 없음에도 섬뜩함과 긴장감이 보는 이를 지배한다. 성공하고자 했던 이들의 뒤틀린 욕망과 광기, 집착의 역사가 어느새 영화 곳곳에서 새어 나온다. 맑은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자랑하던 스탠턴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탐욕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관객 역시 영화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 이야기를 이해하기도, 예측하기도 어렵지 않지만, 뻔히 그려질 다음 장면마저 손에 땀을 쥐고 볼 수밖에 없다.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야기와 연출 못지 않게 영화를 지탱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모든 출연진이 그러했지만 특히 브래들리 쿠퍼와 케이트 블란쳇은 그야말로 신들린듯한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마저 그들 사이 넘실대는 감정의 폭풍 속에 휘말리게 했다. 그들은 기예르모 델 토로가 그리고자 했던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더없이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스탠턴은 어느새 자신을 잃어버린 기인으로 변하고, 인생의 피해자로 비춰지던 릴리스(케이트 블란쳇)는 악몽(惡夢)으로 화해 관객의 숨마저 멎게 한다.
요컨대 연기와 연출, 이야기 삼박자를 고루 갖춘 작품이다.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는 완벽함으로 영화는 보는 이의 마음을 훔친다.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음에도 별다른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으며, 이야기와 미장센 뒤 숨어있는 여러 의미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재미도 있다. 현실을 그렸지만 판타지를 보는 듯 하고, 매력적인 허구의 이야기지만 더 없이 우리의 마음과 사회를 꿰뚫는다. 미리 단언하는 것이 경솔할 수 있으나, 올해 만날 수 있었던, 그리고 만날 작품들 가운데도 감히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을 만 하다.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기본정보
성공에 목마르고, 욕망으로 가득 찬 스탠턴. 절박한 상황 속에서 유랑극단을 만나 독심술사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하는 기술을 전수받는다. 수려한 외모, 현란한 화술, 마음을 현혹시키는 능력으로 뉴욕 상류층을 상대로 부를 손에 쥐게 된 스탠턴. 그는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허우적대기 시작하고, 스탠턴의 마음을 꿰뚫은 심리학자 릴리스 박사는 그에게 뉴욕에서 가장 위험한 거물을 소개시켜준다.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는 수려한 외모와 현란한 화술을 지닌 스탠턴이 유랑극단에서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기술을 터득한 뒤, 뉴욕 상류층을 현혹하며 점점 더 위험천만한 욕망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렸다. 작품상과 촬영상, 의상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등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판의 미로’, ‘셰이프 오브 워터’ 등을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이며, 윌리엄 린지 그레셤이 집필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개봉: 2월 23일/ 관람등급: 15세 관람가/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출연: 브래들리 쿠퍼, 케이트 블란쳇, 토이 콜렛, 윌렘 대포, 리차드 젠킨스, 루니 마라, 론 펄먼, 메리 스틴버겐/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러닝타임: 150분/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