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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조건 없이 용서하자 내가 살았다.

신에게서 벗어나다

by 엄마쌤강민주

새벽녘,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방 안. 나는 언제나처럼 생활 속의 반야심경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고요 속에 숨어 있는 글자들을 읽었다. 반야심경 속 글자들은 마치 속삭이듯 내 마음에 다가왔다. 불경을 다 읽고 기도를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손끝이 시리고,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음 한편에 어젯밤 구미 이모가 들려준 전생 이야기가 맴돌았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나는 신라에서 백제 왕에게 보내진 여인이었다. 백제의 신하들이 경계하는 와중에도 왕의 사랑을 얻었고, 그의 아이를 품었다. 그 아이가 바로 구미 이모였다. 신라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불붙었을 때, 나를 지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나는 낙화암 절벽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했다.


이모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애틋함은 내 가슴을 찍어내리는 듯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나의 전생 이야기일까? 이모는 그 나이의 여자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졸업했고 수많은 책을 읽은 책벌레다. 혹 이모의 무의식 속에 들어있던 역사를 내 전생 이야기라고 전해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요즘 나는 꿈과 현실이 뒤엉킨 기묘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신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놀라운 것은 내가 꿈에서 본 것을 이모가 이삼일 후에 기도 중에 보았고, 그 내용은 무속인의 예언과 정확히 일치했다. 무엇보다 내가 꿈에서 본 일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나에게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미쳤다”라고 조롱하리라.


나는 특히 이모가 전한 마지막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어미인 내가 죽을 때마다, 남편에 대한 원망 때문에 아들인 구미 이모를 원망하고 저주했다. 그래서 구미 이모의 인생이 세세생생 불행했다고 하는 말.

나는 찬란했던 구미 이모의 청춘이 어둠으로 물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미친 사람 취급받는 이모가 겪어온 삶의 파편들, 그 삶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 그녀의 고통이 나의 저주 탓이라면…. 마음이 무거웠다. 혹시 이모의 말대로 이모의 불행이 내 원망 탓이라면 내가 한 원망을 거두어들이면 이모의 삶에 빛이 돌아올까?


나는 다시 두 손을 모았다. 간절한 기도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이모를 포함하여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저에게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그 시작이 저였음을 압니다. 제가 먼저 그들에게 참회하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지은 죄를 조건 없이 모두 용서하겠습니다. 저에게 지은 죄로 인하여 업연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모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 안에서 업연을 녹이고 평안함을 얻게 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고 일어섰을 때였다. 오른쪽 발끝이 저렸다. 무심코 내디딘 한 걸음, 발목이 뒤틀리며 뚝 소리가 났다. 찬 공기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통증이 퍼지고, 어둠이 시야를 삼켰다. 눈을 뜨니 몇 초가 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몸에 깃들어 있던 신이 나를 떠났다.


신이 떠났다는 말을, 처음으로 내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 대전에서 인천으로 막 돌아와 있었다. 햇살이 풀밭 위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우던 오후였다. 무럭이와 함께 정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이는 장난스러운 손짓으로 나를 웃게 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참 평화롭고 조용했다.

“무럭 엄마.”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6층에 사는 한나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무럭이가 돌도 되기 전이었다. 유모차에 앉아 장난감을 더듬던 아기 무럭이 곁으로, 8살 한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다가왔다. 두 아이는 나이 차를 잊은 듯 까르르 웃으며 어울렸고, 우리는 그 웃음소리에 이끌려 자연스레 말을 트게 되었다.


한나 어머니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키와 수수한 옷차림, 조용한 말투.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우리 둘 다 ‘K장녀’였고, ‘K장남’과 함께 사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우리는 삶의 결을 나누듯 이야기했다. 그녀는 교회를 다니는 신자였지만, 내가 열심히 읽고 있던 불경이나 불서 이야기도 흥미롭게 귀 기울여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이야기처럼.

그날, 정자에 다가온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신비로웠다. 속내를 품은 듯 깊었고, 햇빛에 닿은 어둠처럼 묘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온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마 전부터 무럭 엄마 얼굴에… 다른 영혼이 보였어.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오늘 보니까… 그 영혼이 완전히 사라졌더라. 3개월 만에 사라졌어.”


나는 숨을 삼켰다. 그때 나는 누구에게도 내 상태를 털어놓지 못한 채 속으로 앓고 있었다. 어머니도, 스님인 큰 이모도, 영력이 있던 구미 이모도 몰랐다. 내가 신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 속의 이야기를, 그저 평범한 이웃이 알고 있다니.


그녀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두 아이를 키우고,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고, 마주치면 인사하며 웃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은밀하고, 어딘가 위험한 빛을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아무도 내가 신을 볼 수 있다는 걸 몰라.”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번은 목사님이 능력이 대단하다며 소개한 전도사를 만났는데, 그 사람 얼굴에… 호랑이가 보였어. 그 전도사가 신비한 능력이 있었던 건 그의 능력이 아니라 호랑이에게 빙의되었기 때문이었어”


그리고는 새로 산 화장대 거울에 귀신이 비춰서 그 거울을 내다 버린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에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건,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어린 시절, 등굣길에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껴 다시 집으로 돌아간 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혼자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두렵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할아버지를 잘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그 뒤로, 할아버지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게 되었단다.


살면서 나는 특정한 종교를 가진 이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깊은 영적인 경험을 한 이들을 종종 만나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누군가를 해하려는 마음 없이, 그저 자신의 것을 조금씩 나누며 조용히 선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먼저 나의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을 조금씩 보여준다. 그들은 대부분 나보다 인생의 선배들이었다. 많은 시간을 지나온 이들이었고, 그래서인지 내게 늘 이렇게 당부했다.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지 마. 미친 사람 취급받을 거야.”


하지만 나는 늘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경험 있는 이들이 모두 침묵한다면, 뒤늦게 이 세계를 마주한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부족하지만, 내가 겪은 것들을 숨기지 않고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나는 나의 경험을 어머니와 구미 이모에게 털어놓았다.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던 이모는 조심스레 내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했다.

“신이 떠났네. 네 몸에서 신이 빠져나갔어. 원래 신이 떠날 때는 머리로 나가며 사람을 쓰러뜨리는데, 넌 발로 빠져나갔네. 천운이야.”


그 이후로 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내 몸을 살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이 없어. 정말 신이 떠났어.”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 마치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던 어둠이 끝내 지나갔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신이 떠난 자리에 고요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의 무의식 세계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들,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마치 꿈결처럼 스며들었다.


그 세계는 신에게 시달릴 때보다 훨씬 생생했고, 그래서 더 두렵고 무서웠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내가 하는 일들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그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세계 또한 삶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레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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