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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전생에 내 아들이었다는 구미 이모

전생 이야기 셋

by 엄마쌤강민주

어느 늦은 밤, 어머니와 나, 그리고 구미 이모가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이모가 문득 내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참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전생에… 신라에서 백제 왕에게 보내진 여자였어.”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모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엔 묘하게 끈적한 진실의 울림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백제의 신하들은 너를 경계했지만, 넌 끝내 왕의 마음을 얻었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어. 그리고 그 아이가… 나였어. 너와 백제 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이 있었다. 이모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쟁이 터졌지. 신라와 백제가 싸우기 시작했을 때, 널 보호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결국… 넌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야 했어. 고국도, 남편의 나라에서도 버림받았거든.”


그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이 나를 깨웠다. 내가 왜 그리도 외롭고, 그리도 아팠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던 깊은 외로움의 뿌리가, 그 순간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모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넌 세상을 원망하며 죽었어. 신라도, 백제도. 그때 너를 버린 사람들… 지금도 그 그림자 아래서 고통받고 있어. 알 수 없는 슬픔, 이유 없는 불안, 쉽게 무너지는 운명들. 그건 너의 저주, 너의 한 때문이야.”


숨이 막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말이 내 안의 고요한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모는 눈을 들어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왕의 아들이었던 나는, 전쟁통에 네 친정아버지에게 구해졌어. 그분은 지금도 그렇지만, 전생에서도 작고 단단한 분이었지. 용맹한 장수였던 그는 어린 나를 몰래 빼돌려 지금의 네 고향, 깊은 산속에서 나를 숨겨 키우셨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모는 오래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는 죽으면서, 아들인 나를 저주했어. 왜 너만 죽어야 하냐고. 왜 나만 살아남았냐고. 그때부터였어. 내 삶이 자꾸 엇나가기 시작한 건.”


그녀의 눈동자에서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 생이 아니라, 몇 생이 흘러간 것 같았다.

“한 번은 미국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적이 있어. 그때도 너는, 내 어머니였어. 그리고 또…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죽었지. 또 나만 살아남았어.”


이모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처럼 가늘어졌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어. 아버지들은 항상 너를 지키지 않았고, 결국 넌 죽었어. 그리고 매번 너는, 살아남은 아들인 나를 원망했어.”


이모의 말이 무거운 연기처럼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순간 분위기를 바꾸려 장난스레 말했다.

“그럼 저한테 잘못했다고 해요. 제가 용서해 드릴게요.”


그러자 이모는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 힘들었다고! 나라도 잃고, 어머니 없이 시골구석에서 숨어 살아야 했던 어린애였다고! 사는 게 고생이었어! 어디 한순간이라도 행복할 수 있었겠냐고!”

그녀는 울고 있었다. 오래 참아온 울음이었다. 서러운 생이, 눈물로 터지고 있었다.

“그게 내 선택이었냐고. 아버지들의 선택이었고, 그들의 비겁함이었지… 나는 그냥, 살기 위해 버텼을 뿐인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물 속에 담긴 시간들이 너무도 무거워서. 전생이라는 말도, 원망이라는 말도 구미 이모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것이 단지 허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래된 진실이, 드디어 이 생에서 말을 걸어온 듯했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수많은 생 또한 반복되었다던 과거와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대전에서 태어나 자랐다. 집안의 장녀로, 어릴 적부터 들은 말이 있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다.”

그 말이 내 인생을 정의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 같은 말을 들었다.

“너는 우리가 어떻게든 가르칠 테니, 네가 성공해서 동생들을 책임져라.”

나는 내 꿈보다 동생을, 내 옷보다 집안 형편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로 자랐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내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려면, 사랑받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부모님의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반대 속에 결혼을 한 나는 친정에 부채감과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남편은 문경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 역시 나와 비슷했다. 부모님, 동생들, 가세… 늘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텨온 사람이었다.


우리 둘은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서로를 사랑했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결국 우리 둘은 여전히 ‘각자의 집’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친정의 손이었고, 남편은 시댁의 발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각자의 집을 위해 ‘무언가’를 얻어가려는 전령이 되었다. 분명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어느새 서로의 집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수한 계절을 지나오며 몇 번이나 아이에 대한 희망을 품었고, 또 몇 번이나 그 희망을 가슴에 묻었다. 그렇게 나는 반복해서 유산을 했다.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맞춰졌다.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왜 내게만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됐던 걸까. ‘나는 수많은 생 동안 내 배 아파 낳은 내 친자식을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에 저주했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오랫동안 이유 없이 느꼈던 죄책감과 슬픔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 모든 고통은 어쩌면 내가 뿌린 슬픔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상처로 남아 원망으로 변하고, 그 원망이 칼이 되어 내 아이들을 스쳐 내가 유산했던 건 아닐까.


2009년 기적처럼 무럭이가 내 품에 안겼다. 온 가족이 함께 울고 웃으며 무럭이를 맞이했다. 친정도 시댁도 모두 기뻐했다. 대전과 문경, 두 집안이 이 아이로 하나가 될 줄 알았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기쁨의 말들 너머로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이 아이조차,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이유’로 쓰일 뿐이라는 것을.


친정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그렇게 귀한 아들을 낳았으니, 시댁에서 얼마나 고마워하겠니. 우리 딸이 이런 큰일을 해냈으니 이제 큰소리치고 살아.”

시댁은 반대로 말했다.

“아들까지 낳았으니, 이제 넌 친정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사람이야. 시댁 편에 서는 게 당연하지.”

무럭이를 품에 안기 위해 죽음보다 더 아픈 시간들을 견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게 이 아이 하나로 변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갈등은 더 깊어졌고, 욕심은 더 커졌다. 친정은 시댁으로부터의 인정을 갈망했고, 시댁은 친정의 자원을 내게서 끌어내려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내 시간과 마음, 내 건강과 꿈은 ‘부모의 욕심’과 ‘남편의 계획’ 사이에서 조용히 갉아먹혔다.

전생의 그녀와 내가 다른 건 나는 내 목숨보다 무럭이가 소중했다. 반복 유산을 하다가 어렵게 얻은 아기, 나를 엄마라 부르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 무럭이를 안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딸, 며느리, 아내로만 불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무럭이의 엄마이고 싶었다. 그 이름 하나면 충분했다. 나는 무럭이를 품에 안고 다짐했다. 이 생에서 만큼은, 어떤 아픔도 사랑으로 덮겠다고. 기적처럼 내게 온 너를, 두 번 다시 잃지 않겠다고.

그래서 매일 밤 부처님께 물었다.

‘무럭이를 지키려면, 내가 이 싸움에서 무럭이를 지켜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다. 더 이상 누구의 기대에도, 누구의 계산에도 나를 내어주지 않겠다고. 내가 나를 잃는 그 길 위에 더는 서있지 않겠다고. 무럭이가 5살이 되었을 무렵, 나는 어머니와 남편을 조용히 한자리에 불렀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남편은 친정 땅을 팔아 사업자금으로 쓰고 싶대요.”

“자기야, 엄마는 시댁 땅을 팔아서 노후자금 마련하자고 하셔.”

“그러니까 둘이서 의논해 줘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정적이 흘렀다. 방 안의 공기가 뚝 떨어진 듯 얼어붙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지금 제정신이니?”

“그런 말 한 적 없어. 미쳤구나, 너.”


그날 이후, 나는 그들의 말을 서로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숨기지도, 바꾸지도 않았다. 그들은 점점 당황했고, 점점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오랫동안 눌려 있던 마음속 작은 창문 하나가 열리는 걸 느꼈다.

나는 알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나는 나를 지켜낸 거라고. 그들은 여전히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 했지만, 나는 오히려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것들을, 나의 이름으로, 나의 언어로. 세상에 드러냈다. 내 글을 본 어머니와 남편은 나에게 더 이상 “미쳤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도 알았다. 세상이 나의 편이 되어주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 역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고, 그들의 가스라이팅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로 단단하게 섰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나는 나를 먼저 지켜냄으로써 무럭이도 지킬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전생의 그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고민했던 그녀 대신, 나는 오늘도 내 삶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말하고 기록한다. 나는 더 이상 착한 딸,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누구의 그늘에도 속하지 않는다.


전생의 그녀와 내가 가장 달라진 점, 나는 내 아이를 저주하지 않고 내 아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 오래 살아남아 생을 즐기기를, 어미인 내가 그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니 어쩜 그녀도 그랬지만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을 잃고 자식을 저주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나는 늘 무럭이에게 당부한다.

“엄마가 너에게 나쁜 말을 하거나 상처를 주더라도 마음에 담지 말아라. 엄마는 완벽한 신이 아니야. 엄마의 욕심 많고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야. 그리고 분노에 휩쓸리기도 하지. 그러니 엄마가 정신이 나가 너에게 나쁜 말을 하더라도, 심지어 너를 알아보지 못해도 엄마의 본마음은 너를 내 목숨보다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렴. 엄마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에 감사하는 사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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